형형색색의 빛으로 불을 밝히는 저녁이다. 하늘을 치솟는 거대한 마천루의 위엄 앞에 짓눌린 사람들, 그들의 영혼은 넝마처럼 찢기고 흩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그 이름의 문명 앞에 맥없이 걷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희망을 잃고 길을 잃은 듯 방황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러한 서울의 중심인 명동 중앙우체국 옆의 빌딩들 사이에 옥외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침대나 이불광고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문구나 이름이 없다. 새로 출시된 상품이라면 회사의 이름이 그리고 광고의 카피가 있을 텐데 없었다. 침대 사진에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베개 두 개가 놓여있고 누군지 모른 두 사람이 함께 누웠다가 방금 일어난 흔적으로 걸려있었다.
이 작품은 다름이 아닌 쿠바 태생의 미국 현대 미술가 ‘팰릭스 곤잘레스-토레스’(1957년생)의 사진으로 제목이 없는 무제 작품인 ‘Untitled(Bed) 1991’ 사진 작품이다. 그는 38세로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형식과 소재면에서 특별한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난민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에이즈 환자였던 그였지만 오직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입지전적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쿠바 출신이고 동성애자였다. 그의 연인 ‘로스’는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작품은 대부분 ‘로스’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사진작품에서 보듯 그와 로스의 일상성을 작품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두 사람의 체온이 남은 것 같기도 하다. 또한, 텅 빈 여백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긴 여행을 떠나버린 연인의 부재에서 공허함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토레스는 애인 로스가 세상을 떠난 뒤, 함께 머물며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던 침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뉴욕 옥외광고판 여러 곳에 전시했다. 그것은 게이라는 성 소수자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지만,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평범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전시된 침대의 작품들은 시간이 흐르면 침대보는 색이 바래고, 움푹 패인 베개 또한 언젠가는 저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연인 ‘루시’의 사라짐의 또 다른 표현이고, 그의 죽음은 살아남는 자에게 남기는 흔적과 기억뿐임을 상징한 것이리라.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으로 동성애에 대한 민감한 문제를 공적으로 제기하며 대항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은 지금도 차갑고 냉정한 것 같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눈에 잘 띄는 공공의 장소에 내걸어 놓는다. 연인인 두 남성이 밤을 지새우며 나뒹굴었던 침대를 보란 듯이 보여주며 그에 대한 사별의 정한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차가운 시선과 외면의 태도를 버리고 동성애자들을 배척하지 말라는 또 다른 부탁의 언어일 것이다.
토레스는 queer이면서 에이즈 환자였고 이민자로서 지녀야 할 주제들을 주류 미술계로 한 걸음 앞서게 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미니멀리즘의 형식을 이용해 동성애나 특히, 그의 동성애의 연인 ‘로스’ 등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을 숨기고 전시했었다. ‘한 쌍의 벽시계’, ‘거울’, 등이 그러한 작품들인데 특히 <무제(로스)>는 다양한 색깔의 셀로판지로 사탕을 포장해 한쪽 귀퉁이에 쌓아 놓고 관객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무게는 대략 79kg을 유지하도록 한 작품이다. 이는 에이즈로 사망한 연인 ‘로스’의 체중이다. 또한, 달콤한 알사탕은 그와의 추억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의미의 다양성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으로는 토레스의 작품은 ‘화이트 큐브white cube’의 위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평을 받는다. 왜냐하면, 미술품이 가지는 불변의 진리, 곧 사방이 막힌 고정된 장소와 좌대 위에 전시되는데. 그는 이러한 전시공간을 벗어나 전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람자의 태도와 시선을 능동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게 하는 의도이기도 하다.
토레스는 미술 평단에서 인정하는 작가이기에 그에 관한 논문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미술계에서도 그의 작품과 유사한 작품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농담 삼아 그의 작품이 한국에 전시되면 안 된다고 한다. 하나의 농담으로 흘리기에는 다소 흥미롭고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그의 영향을 받는 작가들이 많다는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빈자리/홍영수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
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
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
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
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
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
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
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
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
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
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던 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
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
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
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며든 고단한 숨소리를
곁에 없어 더 사랑하게 되는
이 절절한 모순 앞에
나의 심장에서 잊혀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지워지는 두려움을
꽉 찬 공허의 그리움으로
동살 잡히는 새벽녘까지
당신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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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Felix Gonzalez-Torres, "Untitled",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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