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늦가을, 우리나라 최초의 蓮 시배지인 시흥시의 관곡지에 갔다. 하늘대는 연잎과 연꽃향은 초겨울로 접어들면서 이미 생명을 다했다. 오히려 이러한 풍경에 시선이 더 쏠리면서 많은 걸 생각게 한다. 필자는 오색단풍이 찬연한 풍경보다는 가을이 끝날 무렵 11월 중순쯤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저물어가고, 사그라지며 무너져가는 절정의 뒤안길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절정의 본질이 남겨 놓은 흔적을 더듬어 찾기 위해서이다.
홀로 서서 늦가을의 연지를 바라보는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잭슨 폴록이 떠 올랐다. 그 이유는, 한여름 연지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연잎과 연잎을 키워 올리는 연대, 연꽃의 향기 등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의 정절이 남긴 흔적, 말라비틀어진 연잎은 바닥에 엎드려 있고, 연 줄기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고, 蓮子를 떨구고 난 뒤 방향 없이 꺾인 다양한 모습들, 이처럼 무질서 가운데 알 수 없는 자연스러움, 모든 모습과 형체들이 중심도 없는 중심이고 주변 없는 주변이었고, 중심이면서 주변이고, 주변이면서 중심인 풍경이 눈에 닿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연이라는 화가가 자연스럽게 액션 페인팅해 놓은, 그 어떤 인위적이지 않고, 무엇을 표현하려고, 보여주려고도 않으면서 의도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무질서의 질서, 질서 속 무질서가 있다. 집에 돌아와서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아 <가을의 리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실 추상회화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구상회화와는 다르게 회화에서 구상 요소를 제거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상하는 사람의 연상작용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추상화 그림의 매력이기도 하다. 폴록의 회화에서 어떤 의미 있는 패턴을 추출할 수 있는 것 또한 그 이유이다.
폴록의 작품을 보면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고 무질서를 쏟아붓고 흩뿌려 놓은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 어떤 무게감이나 권위, 힘 등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작품을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세히 보면 무질서 속 질서와 의도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어서 식상하지가 않다.
추상회화의 그림이 애매모호한 것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 속 내용이다. 단순히 감응할 수 없고, 또한, 구체적인 현실을 표현하지 않아서 모호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림은 현실적 내용을 담는 예술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추상화 앞에서 황당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이토록 오랜 관습과 고정관념을 통해 그림을 본 이유이기도 하다.
폴록의 작품 ‘<가을의 리듬> No. 30은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작품 중 하나다. (266.7cm * 525.8cm), 그림의 기법은 바닥에 펼쳐 놓은 캔버스 천에 위에서 작업하고, 페인트통에서 페인트를 직접 붓거나, 붓과 다른 기구들을 사용하여 페인트의 흐름을 떨어뜨려 물감을 캔버스에 던지는 방법이다.
폴록의 얘기를 들어보자 “내가 그림 속에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상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끝났을 때이다. 그때 나는 변경을 가하기도 하고 이미지를 파괴하기도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폴록의 작품에 드러난 드리핑 적인 그림 그리기와 화면의 행위를 보면 헤엄치는 듯, 순간순간 지속적인 행위를 한다. 그의 ‘몰아沒我’적 상태에서의 행위는 그 어떤 통제나 관념을 벗어나는 자동기술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같은 폴록의 액션 페인팅의 유사성은 동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문동文同’이라는 화가인데 그는 “맨 처음 나는 대나무를 보고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거기에 빠져 의식을 잃었다. 돌연 내 손에 쥐고 있는 붓 내 앞의 종이가 있는지조차 까마득히 잃어버렸다.” 또한, 당나라 중기 때 현대 액션 페인터보다 더 과격한 화법을 구사한 화가가 있는데 그가 ‘왕묵王墨’이다. 그는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실크 위에 먹을 엎지르고 뿌린 다음 손으로 찍거나 붓으로 문지르는 행위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처럼 동양예술에 감응된 서양의 예술가 중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등 문학과 예술 분야에 숱하게 많다. 그들에 의해 마련된 액션 페인팅도 같은 이치이다. 그들은 동양의 서예에서 착안한 筆線, 빈 공간 중심의 회화를 탄생시켰다. 물론 그 이전에 유럽을 휩쓸고 간 인상파 등은 일본 풍(자포이즘)에서 매료되기도 했다. 이처럼 동서양 간의 문학, 예술적 유사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것이 한낱 ‘왜곡된 복제’이든, ‘우연의 일치’이든,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사실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이후에도 현대미술은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禪 사상이기도 하다.
관곡지에서 보았던 늦가을의 풍경, 그냥 지나칠 수 있고 흘겨버릴 수 있는 소소한 일상 속 풍경에서 느끼고 다가오는 그 무엇들을 생각해 봤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히 손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사상과 철학적 표현방식이라면, 내가 관곡지의 풍경을 명명命名한‘가을의 리듬’을 보는 것 또한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상과 철학적 행위가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가을의 리듬*/홍영수
그 어디에도 눈 둘 곳이 없다
아니,
어디에도 눈을 둘 수 있다
머물 곳, 그 어디에도 없다.
아니,
어디든지 머물 곳 많다
네가 없으니 모두가 나이고
내가 없으니 네가 전부다.
엉킴 속 풀림 있고
설킴 안 형태 있다
중심 없는 중심
주변 없는 주변
*관곡지에서 만난 蓮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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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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