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죽음, 그 너머의…

홍영수 시인(jisrak) 2023. 4. 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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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가 죽는다. 그 과정은 신체적인 조건과 기능, 장기 역할의 노후로 인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일 수도 있고, 또한 예상치 못하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필연적으로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적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고하, 빈부격차,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닥쳐오는 절대적인 운명이다. 다만, 언제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르는, 라나(k. Rahner)의 말처럼 어두운 운명이요, 밤에 찾아오는 도둑이라고 했듯이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생물체의 탄생 이후에 죽음에 대한 사유는 생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예술적 철학적 사유가 아닌가 한다.

 

서양은 죽음을 불멸로 극복하려 한다면 동양적 사유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인다. 어떻게 수용하든지 필자는 동양적, 즉 장자의 입장에 기울기를 한다. 장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인다. 기가 변해서 생명이 되고 죽음 또한 기가 변화하는 모습의 하나일 뿐이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바라본다. 그 이유가 바로 그의 아내의 주검 앞에 잠시 곡()을 하다 멈추고 나서는 슬퍼하지도 않고 곡도 하지 않으면서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장자가 바라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생사를 벗어나 바라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벗어나 끝과 시작이 없는, 즉 생사를 잊는다는 것이다. 생사를 하나라고 생각한 이유는 모든 것에 순응하고 흐름에 따른다는 삶의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필자가 최근에 가까운 사람의 주검을 바라보며 통한의 이별을 맞이했을 때 그동안 더불어 살아오면서 겪었던 행불행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인생 여로의 종착역에서 도착했을 때 느낀 점은 어느 순간 없었던 내가 우주라는 공간에 피투적 존재가 되어 주어진 삶만큼 살다가 때가 되어 다시 본래 없는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 흔한 얘기로 한 줌의 재가 되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의 말처럼 한 호흡 사이에 목숨이 있다고 했듯이, 죽음은 선형적인 삶의 연장선에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 속에 항상 내재 되어 공존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형제였고, 그리고 친구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불어오는 바람에 지는 나뭇잎처럼 떨어졌다. 체온은 싸늘했고, 저승의 차가운 냉기만이 보는 이의 살갗으로 스며들 때 마음은 춧돌을 달고 물밑으로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주체적, 개인적 삶을 뒤로하고 가장으로서, 직장에서 자신의 쓰임에 충실하다 어느 한순간에 세상의 덧없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훌쩍 가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쓰임보다존재가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태어나기 전 본래의 삶이 없었고 또한 형체도 없었다. 그러다 본래 없는 그곳으로 가는 것 즉, 무언의 , 다시 본래의 없음으로 돌아가면서 태어날 때 꽉 움켜쥐었던 손이 죽음을 맞이해서는 두 손을 펴고 있었다. 텅 빈 손, 남은 자에게 모든 것 다 내주어서일까?

 

사실 삶과 죽음은 함께하는 것이다. 삶의 끝은 죽음이며 죽음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다. 모든 생명체, 인간의 삶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덧없고 부질없다. 그 언젠가 다시 태어날, 부활이나 영원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문학, 예술의 측면에서는 가능하나 실제적인 한 인간의 생이 끝났을 때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들었다. 서산대사의 해탈시를 보자.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으오.

 

죽는 모든 것은 그들이 처음 왔던 원소로 분해된다. 처음 이전의 (the first nothing)로 소멸한다. 三更이다. 4월의 빗물이 베란다 창에 어른거린다. 눈물 없는 울음에 눈물이 흐른다.

 

끝맺으며,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의 유서를 보자.

내가 혼수상태가 되거든 이틀을 넘기지 마라, 소생하지 않으면 엄마, 동생 손잡고 산소호흡기를 떼라. 절대 연장하지 말라. 화장 후에는 보령 관촌에 뿌려라. 문학상 같은 것 만들지 말고 제사 대신 가족끼리 식사나 해라. 나는 이 세상 여한 없이 살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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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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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가 죽는다. 그 과정은 신체적인 조건과 기능, 장기 역할의 노후로 인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일 수도 있고, 또한 예상치 못하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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