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대원각에서 길상사로 바뀐 이 절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7,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찰 내의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근대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 밀실 정치의 대명사였던 3대 요정이 있는데 삼청각, 청원각, 그리고 현재 길상사로 변한 대원각이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은 법정 스님께 대원각을 시주하면서 그 대가로 달랑 염주 하나 받았다. 현 시가로 천억이 훨씬 넘는 재산이다. 김영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석 시인이 사랑했던 여자 김자야(金子夜)로 익히 문학사에 알려진 인물이다. 191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조선 권번(기생조합)에 들어가 정악계의 대부 하일규를 스승으로 모시고 진향(眞香)이란 기명을 받았다.
김자야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으며, 1995년에 ‘내 사랑 백석’이라는 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자야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 문학상을 제정케 하여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오고 있다.
길상사의 일주문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설법전 앞에 늘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관음보살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치 성당의 성모마리아 상과 거의 흡사하다. 그 내용을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목인 최종태 교수가 조각했다고 한다.
종교라는 한 지붕 아래서 아옹다옹하며 서로가 헐뜯는 이 시대에 그것도 다종교인 우리나라에서 종교 간의 화합과 소통의 상징성으로 聖母와 佛母를 동시에 보는 것 같아 마음 한편에 편안함을 느낀다. 이 조각상 대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진향은 함흥에서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갔다가 시인 백석을 만났다. 첫눈에 반한 백석은 스물여섯, 진향은 스물두 살이었다. 眞香이라는 기명은 '물 가운데서도 참으로 깨끗하고 맑은 물은 일체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하는 ‘진수무향(眞水無香)’이라는 사자성어에서 그의 인품을 빗대어 기명으로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노자의 진정한 소리는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大音希聲)는 말이 함께 떠오른다.
평생 가슴에 백석을 묻고 살았던 김자야, 백석(白石 또는 白奭, 1912~1995) 은 천재 시인이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고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1936년 어느 날 백석은 김영한이 사다 준 당시선집을 읽다가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이태백의 시를 발견하고는 즉석에서 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 준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결혼해서 아내가 있던 양반댁의 백석과 직업이 기생인 자야의 기구한 운명은 당대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에는 이별이라는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돌고 도는 인생처럼 또다시 그 둘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서울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 학생들을 데리고 백석이 온 것이다. 아니, 자야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백석은 학생들을 남겨두고 몰래 도망갔던 사랑하는 자야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삼사 년을 더 뜨거운 사랑으로 불태웠다. 그러나 부모의 완고한 감시와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린다. 자야에게 만주로 함께 도망가자고 했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만주로 홀연히 떠나면서 불후의 명작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봉투 속에 남겨둔다.
백석은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장춘과 안동 등지에서 측량기사, 세관원, 소작인 등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며 고생하다 해방을 맞이해서 고향 정주로 돌아온다. 이때 지은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이라는 유명한 시가 이때 지은 것으로 친구의 손을 거쳐 1948년 서울에서 발표되어 남쪽에 알려진 마지막 작품이다.
그토록 젊었고 모던보이였던 백석도 떠나고 그러한 백석을 평생 가슴에 안았던 자야도 가버린 길상사, 몇 번을 갔었지만, 여전히 계곡엔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 꽃잎 주워 모아 소리 꽃을 피워내며 허공에 매달린 風磬만이 그들 사랑의 행적을 더듬어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자야는 평생을 백석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를 그리워하다 굉장한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고 그가 시주한 길상사에 그녀의 혼백을 묻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지며 한 폭의 동양화로 그려졌다. 백석이 봉투 속에 남긴 시 한 편을 보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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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길상사 관음보살상(서울 성북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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