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의식은 성심(成心)과 허심(虛心)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관계든, 유대에 의한 것이든 고정되고 불변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것을 고정적 실체가 있는 시각으로 대상화하는, 무의식적 모방인 미러링(mirroring)의 행위가 성심(成心)이라면, 이 성심을 해체하는 것이 바로 허심(虛心)이다.
붓다도 장자와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無는 有를 전제로 하는 사상이다. 말 그대로 空은 대상이 없는 사상이고 선악(善惡), 미추(美醜), 시비(是非) 등의 이분법적인 가치를 벗어난 사고이다. 하나인 것을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잘못된 사고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붓다와 장자는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성심(成心)’은 피아(彼我)의 구분과 물아(物我)의 분리를 하는, 실재의 내가 아닌 허구적 마음과 생각이다. 그리고 제한된 시선과 지식, 경험 등으로 주변의 세계를 분별하고 지배하고 소유의 대상으로 파악한 마음이다. 이러한 분별 의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虛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SNS나 인터넷에서 필자의 아이디가 주로 ‘無何有’로 써 왔고 지금도 사용 중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절대 자유 경지의 주체적인 것은 인간들인데 이러한 인간들이 소요하는 곳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 한다. 장자에 의하면 붕새가 날아간 남쪽의 바다 북명(南冥)이다. 여기서 가져온 것이 필자의 아이디이다
그러나 이러한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향을 말한다. 어쩜 무릉도원이나 토머스 모어가 얘기한 유토피아, 또는 예이츠가 가고 싶어 하는 이니스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듯 장자가 ‘무하유지향’을 얘기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이분법적인 사고와 편견인‘성심(成心)’에 사로잡혀 시시비비로 사물을 가리는 인간의 편협한 생각과 독단적 위험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도가 아닌가 한다.
이렇듯 장자의 사상은 성심에서 벗어나 소요유하듯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한되고 편협한 시선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소요하고 무위(無爲)하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성심, 즉 자아를 가지고 있기에 자신만의 가치로 남을 판단하고 시비를 가르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무하유지향의 삶을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否認)해야 한다. 곧 자유의 정신세계에 걸림돌이 되고 장애물이 되는 것을 장자는 ‘성심’, 즉 ‘자아의식’으로 보았다. 평소의 ‘나’는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사물과 상대를 판단하고 분석해서 평가한다. 이러한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기無己’, 즉 자기중심적인 판단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장자는 오상아(吾喪我), 즉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했듯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맞이하는 소요유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도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했다.
이렇듯 장자는 인간의 마음을 성심(成心)과 허심(虛心) 나눈다. 그것은, 편견과 선입견 등의 뜻을 가진 성심에서 오는 분별 의식과 차별 없이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난 도심, 허심을 말한다. 성심은 자기중심적 분별 의식이기에 가치관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에 문제점이 발생하는 반면에, 이러한 성심을 해체해서 분별과 차별의식을 없애는 허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한다.
참다운 삶이란 자기중심이 아닌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주어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참된 자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벗어나고 초월해야 한다. 고쳐야 할, 좋지 못한 마음의 ‘성심’은 분별과 대립의 세계로 꽁꽁 묶어둔다. 이렇게 단단하고 딱딱한 마음이 있는 곳은 언제나 시비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신적 병 때문에 ‘참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장자의 ‘제물론’에는 “나와 자네가 논쟁한다고 하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를 이기지 못했다면, 자네는 정말 옳고 나는 정말 그른 것인가?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옳고 자네는 정말 그른 것인가?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 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자네도 나도 알 수가 없으니 딴 사람들은 더욱 깜깜할 뿐이지.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를 판단하면 좋을까?” 라고 나와있다.
결국 모든 의견은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제발, 성심을 버리고 허심으로 돌아가자. 서울 한 복판의 광장에서 서로가 벽을 쌓고 등을 지고 있다. 같은 언어인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데 시비의 기준이 다른‘성심(成心)’의 장막에 가로막혀 자음과 모음들이 비뚤어지고 흩어지고, 하물며 뱉어내는 언어들이 경음화 되어 세종대왕 동상을 가로지르며 넘나든다.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닌, 너도 있고, 나도 있는 공존의 광장에 서자. 광장도 비워야만 햇빛이 고이듯 ‘허심虛心’의 텅 빈 마음에는 오가는 정의 따스함이 안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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