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고 했다. 자연 속에서 물리적으로는 갈대처럼 한없이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모든 걸 수용하고 포옹할 수 있는 실존적 인간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은 태풍이든 미풍이든 이리저리 휩쓸리고 눕다가 일어서고 일어섰다가 다시 눕고 나부끼면서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출근하고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매일 반복 되는 시계추 같은 삶, 이렇게 패턴화된 기계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다.
또한, 생각과 사색 속에 자신을 관조하기보다는 손에 쥔 핸드폰이나 컴퓨터 등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기 때문에 사유하며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나를 사유케 하는, 그래서 최면술에 걸린 것 같기도 하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타인이 생각해 주는 대로 사는 것을 비본래적 삶이라 했다. 우리 속담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듯이 남이 하니까 덩달아 하는,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각박한 현실에서 본래적인 나를 찾기 위해서 가끔 숲길을 거닐 필요가 있다. 나지막이 미음완보微吟緩步 하면서 풀벌레의 울음과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느낄 때 숲의 온갖 생명들 또한 나를 느낄 것이다. 이럴 때 자연과 더불어 나의 위대함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숲을 이루는 온갖 초목들을 바라보라. 그렇게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사색의 숲속에 안겨보라.
걷고, 거닐고, 걸어가다가 너럭바위를 만나면 잠시 쉬면서 바위의 깊숙한 속내에 아직도 들끓고 있는 용암의 분출 욕구에 귀 기울이고, 때론 풀잎에 이유 없이 주저앉아 미풍에서 흔들거리는 풀잎들의 속울음을 보고, 풀벌레와 새들의 푸른 노랫소리를 들어보라. 그리고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가짜인 나, 그림자와 순간순간 치솟는 욕망덩어리의 생각과 불순한 사고의 곁가지들을 발로 차고 손으로 밀쳐버려라. 더 이상 그들의 하수인이 아니고 고용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숲길은 생각의 길이고 사색의 장소이다. 인간이 직선으로 그어놓은 고속도로가 아니고, 인간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포장한 이기적인 길도 아니다. 숲길은 아무런 사리사욕이 없다. 무심코 걷는 발길과 숲의 주인인 짐승들이 함께 자연법에 따라 직선과 곡선으로 그린 합작품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끝자락에 들어서면 더 이상 갈 수 없다. 이것은 곧 인간의 무한한 욕심과 욕망, 절대로 버리지도 놓을 수도 없는 권력과 부와 명예 등을 아낌없이 과감히 내려놓으라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그러는 순간 다시금 또 다른 길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의 이기적 사고를 버리고 이웃과 사회, 나를 위해서 저 어둠의 뒤안길로 숨어들지 말고 과감히 뛰쳐나와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사색의 숲길을 걸으며 체득하라. 숲길이 그러하듯이 그 작은 길 가운데 때로는 돌멩이도 튀어나와 있고 커다란 바위도 있지만, 숲길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물길을 만나면 물속에 잠기고, 나무뿌리가 가로막으면 웃으면서 껴안고서 자신만의 길을 낸다.
사색의 숲길을 걸으면서 현실 속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때 분명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가 될 것이다. 숲길이 장애물을 받아들이고 불평 없이 에둘러 가듯, 우린 삶 속의 온갖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더 나은 결과물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숲길은 인위적이지 않아서 정리 정돈이 안 된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그런데 인간에 의해 도구적인 상처를 입을 때 숲과 숲길은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순수한 영혼도 순수함에서 더 멀리 나아가면 그 거리만큼의 고통을 받는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겪게 되는 고통과 아픔만을 기억할 게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그 고통과 아픈 상처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왜냐면, 깨달음 뒤에는 더욱 풍요로운 삶과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받아들여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숲길에서 사색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꿈을 먹고 행복을 추구한다. 이러한 것을 추구할 때는 마주한 불안감과 두려움의 시냇물을 건너야 한다. 그곳에는 징검다리도 섶다리도 없다. 그렇지만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건너야 한다. 그곳에 있는 꿈과 행복을 위해서다. 숲길이 시냇물을 만나면 물속에 잠기고 낮은 언덕은 피하지 않고 온갖 짐승들의 배설물마저 밑바닥에 오롯이 받아내기에 숲길은 숲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요음영逍遙吟詠은 바로 이러한 숲길에서 행하는 사색의 행위이다.
우린, 아침이면 떠오르는 햇귀의 빛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일상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가끔은 집 근처의 숲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곳에서 새들의 지저귐과 숲에서 피어오른 숲 향의 색깔로 나만의 그림을 그려보자. 삶이 풍요로워지는 길이란 이처럼 숲길을 거닐며 자그맣게 읊조리며 나지막이 걸으며 사색하는 것이다. 비록 거대한 자연이 하나의 티끌과 작은 점 하나로 나를 집어삼킬지라도 우린, 생각과 사색하는 힘으로 웅장한 자연을 삼킬 수도 있다. 숲길을 微吟緩步 하며 사색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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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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