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짝짝이 신발을 신고 물구나무를 서보자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0. 1. 10:44

어린 딸(당시 3)은 짝짝이 신발만 신었다. 짝짝이 신발이 아니면 동갑내기 언니 신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겨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겨 다녔다. 어느 날 동네 슈퍼를 가는데 짝짝이 신발의 딸을 보더니, 중년의 남성분이 지금은 신발이 그렇게 나와요?”라고 물었다. 어쩌다 만취한 상태에서 친구의 신발과 바꿔 신을 수 있는 세대, 중년의 삶에서는 보지도 못하고 있을 수 없는 현실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틀에 갇히고 굳어져 중층적으로 두꺼워진 사고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칠 때가 있다. 변화 없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뭔지 모르게 누름돌에 억눌린 듯한 감정을 느낄 때 특히 그렇다. 얼마나 독특하고 창의적이고 신선한 발상인가를 나에게 각인시켜준 행동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발을 꼭 맞춰 신어야만 하는가. 짝짝이 신발을 신은 변화한 모습에서 생활화되어 습관화된 행동의 패턴들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신선한 충격 속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견한 것이다.

 

변화 없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각의 신발을 신고 다니면 보이는 것 외에 보이는 것이 없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위해서는 때론 짝짝이 신발을 신어봐야 한다. 생각의 신발을 신고 거꾸로 서보거나 아님, 뒤집어 보아야 감춰지고 숨겨진 것들이 드러나며 눈에 들어온다. 생각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의 自我主意적 시선을 접고 내가 없는 無我主義적인 보다 넓은 관점과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자. 어린이들이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밑으로 고개 숙여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는 것처럼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시각을 벗어던지고 뒤집고 물구나무서고, 때론 곡선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자. 시선의 탈바꿈은 분명 익숙한 세계를 떠나 새롭고 창의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변화 없는 변화에 강력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잠든 고정관념에 청진기를 대보고 죽비로 내려치든지, 졸고 있는 사고의 틀을 도끼나 망치로 내려칠 때 사유의 확장성이 생성되고 그래야만 발상의 전환을 가져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 흥부가 박을 타서 금은보화가 쏟아졌듯이 딱딱하게 굳은 생각의 박을 톱으로 잘라내야 그 속의 하얀 박속과 바가지라는 보물을 얻을 수 있다. 온통 돌이나 흙의 성벽이라는 껍데기로 에워싸여져 있는생각의 에서 탈출해야 한다. 붓다도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떠나 설산 고행 끝에 진리를 터득하지 않았던가.

 

이렇듯 틀에 갇힌 자신만의 영역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익숙함과 생활화되어 굳어진 영토에서 탈영토화를 해야 한다.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기존의 영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때 보이는 것은 예전의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이때 다가온 의미는 발견과 창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닫힌 시각엔 보이는 풍경만 보이지만 열린 시각엔 다른 풍경이 보인다. ‘생각의 안에 갇히지 말고 과감히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낯선 새로움상상의 날개를 만나 활짝 펼쳐보자. 그러면창조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낯설게 하기란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츠키가 했던 말이다. 이 말은 거꾸로 보기삐딱하게 보기이다. 창조란 에서 를 찾는 것이 아닌 에서 또 다른 를 찾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인습적인 가치체계와 고착되고 편협 된 사고의 틀과 시각을 짓부숴야 하고 각도를 달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눈앞의 것들이 새롭고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은 논자들은 조국 민족 부처 중생 등으로 해석하고 학교 때 그렇게 배웠지만, 결혼도 했었고, 승려가 되어서도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 딸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연인을 그리워한 일 수도 있지 않은가. 백호 임제(林悌1549~1587)는 대문장가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붕당 폐해를 우측에는 가죽 신을右革) 좌측에는 짚신(左草)을 신고 풍자했다. (右革左草) 그러나 호걸인 그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짝짝이 신발을 한 번쯤 신어보고 싶어 신어보는 건 아니었을까. 이러한 해석과 바라보는 관점도 낯설게 보기의 한 방편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물의 물성과 인간사의 이치를 판단한다. 그 판단의 기준은 바로 당장 눈에 보인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 생활하고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면 햇빛도, 달빛도, 새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만, 안에 갇혀 있으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사고의 영역을 넓힐 수 없다. 기존한 것들에 대해 역설적 해석, 독특한 관점, 전복적인 사고와 뒤섞음 등은 고정관념을 부정하고 거꾸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존 케이지나 마르셀 뒤샹 등이 여기에 속한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신고 다니는 신발만이(같은 짝의 신발) 아닌 어린 딸이 짝짝이 신발을 신는 것을 보고 새로움과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엄동설한의 매듭달이다. 신발도 양말도 장갑도 한 번쯤 짝짝이로 신고 끼어보자. 그리고 물구나무서서 해오름달을 맞이하자 이 또한 새롭지 아니한가.

 

 

[홍영수 칼럼] 짝짝이 신발을 신고 물구나무를 서보자 - 코스미안뉴스

어린 딸(당시 3살)은 짝짝이 신발만 신었다. 짝짝이 신발이 아니면 동갑내기 언니 신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겨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겨 다녔다. 어느 날

www.cosmia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