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집안의 물건들을 일부 정리했다. 오래된 옷가지들과 손길 닿지 않은 이곳저곳에 있는 잡다한 것들을 분리수거 해 놓으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렇다고 집안이 비워진 느낌이 없고 산뜻한 느낌도 별로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한쪽에 세월의 나이를 먹고 드러누워 죽은 듯한 잡지들과 빛바랜 고서적들의 처리를 두고 곁지기와 심한? 입씨름을 했다. 그때 어느 작가와의 얘기가 생각났다.
10여 년 전쯤, 널리 알려진 작가와의 길거리 차담에서 들은 얘기다. 단독주택에 사는데, 외국에 살던 딸이 와서 하는 말 “책의 무게로 무너질까 무섭다”라며 지하로 서재를 옮기자고 했단다. 그래서 지하로 서재를 옮겼다 한다. 비단 딸의 권유 때문만이 아니었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무엇인가에 대한 얽매임과 구속됨에 의존해 살고 있는데도 정작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집착과 욕망, 소유욕이 없다면 무엇을 바라고 하고픈 일에 대한 기대치와 갈망 없이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살며, 살아가며 수없는 물건을 사서 보관하고 쌓아놓고 산다. 그러면서 정리하고 관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세월의 손때가 묻었다고, 그래서 기념할 것이라고, 추억거리라고 하면서 버리지 못하고 한정된 집안의 공간을 물건들이 점령하고 있다. 최근에 미니멀리즘에 대한 얘깃거리들이 많이 떠돌고 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는 종이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모든 것들을 최소로 줄이면서 버릴수록 행복함을 느낀 미니멀리스트 작가의 얘길 떠올리며,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실제로 실천했던 법정 스님의 수상집 <버리고 떠나기>와 박경리 선생님의 시 ‘옛날의 그 집’의 마지막 구 “내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렇게 법정 스님이나 박경리 선생님처럼 말할 수 있는 그분들의 삶을 반추해 볼 때, 익을 대로 익은 삶의 절정에 올라서서 삶의 발자취를 뒤돌아본 뒤의 아포리즘 얘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앞마당의 감나무에 열린 감도 때가 되면 떨어지고 뒷산의 밤송이의 밤도 스스로 알아서 떨어지듯,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면, 자연을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없었던 것들의 본래의 자리인 없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이다.
손에 꽉 쥐고 싶은 마음 때문에 손을 빼지 못하고 결국엔 욕망과 집착과 소유욕에 얽매이게 된다. 그것이 물건이든, 재물이든 명예욕이든 자신도 알게 모르게 마음이 쏠려 있다는 측면에서 욕망의 편집증적 투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린 간직하고 담아두는 소유물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소유물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사실 그 소유물에 얹혀 쫙 달라붙어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년 전, 청계천 8가 다리를 지나가다 다리 난간을 한 손으로 붙잡고 물이 흐르는 개천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을 목격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즉시 112에 신고하고 떨어지려고 하는 곳을 향해 급히 내려가는데, 그는 다리 아래 솟아있는 돌멩이를 피해서 물 위로 떨어져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살았다. 무슨 일이 있어, 어떤 이유가 있어 그러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비록 힘들고 고단하고 지친 삶일지라도 목숨을 함부로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방하착(放下着)은 마음속의 번뇌와 갈등, 집착, 원망 등을 비우고 그러한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마음마저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없을 수 없지만, 그 소유물에 속박받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처럼, 박경리 선생님의 시구처럼,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 소림사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하고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금강경에 나온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라(應無所住 而生其心)”의 명구처럼.
옛날의 그 집/박경리
(전략)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ㅅ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
퍼온 이미지.
https://www.cosmiannews.com/news/285359
'나의 인문학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하철에서 만난 도미에의 <삼등열차> (1) | 2024.06.03 |
---|---|
영국의 장미, 자클린 뒤 프레 - 신들린 듯한 미친 연주 (0) | 2024.05.27 |
백치(白癡), 유로지비(holy fool)가 되어보자 (0) | 2024.05.06 |
‘견뎌냄’의 숭고, 나무의 뿌리 (0) | 2024.04.29 |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에서 ‘절규’를 떠올리다. (1) | 2024.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