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시는 그림을, 그림은 시를 기억한다.

홍영수 시인(jisrak) 2025. 2. 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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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칼럼] 시는 그림을, 그림은 시를 기억한다. - 코스미안뉴스

시의 비유법 중에는 ”~인 듯“, ”~같이“, ”~처럼“ 등의 직유법이 있다.”‘달처럼 둥근 얼굴’,‘사랑은 샘물처럼’ 등 이같이 직유법은 재현이나 모방, 또는 본받는다‘라는 뉘앙스를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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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비유법 중에는 ”~인 듯“, ”~같이“, ”~처럼등의 직유법이 있다.”‘달처럼 둥근 얼굴’,‘사랑은 샘물처럼등 이같이 직유법은 재현이나 모방, 또는 본받는다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시를 읽는 독자가 가장 흔하게 취한 입장은 시가 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문제이다. 어떤 소재를 선택하고 현실이 어떻게 시에 반영되어 있는가이다.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태도에서 우린 그러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때 세계란 시인이 시 속에서 표현한 내용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같이 작품을 그것이 담고 있는 세계에 비추어서 논하려는 입장이 바로 시를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인 모방론이다. 모방은 모사(模寫)와 비슷한 말이다. 이처럼 본체와 유사한 것이나 닮은 것을 가리킨다는 것은 모방론 작품에 현존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모방론은 시론이나 문학론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용어가 플라톤에 의해 서구에서 쓰였다. 물론, 동양의 공자도 논어에서 시 속에는 초목, 화훼에서부터 인간세계의 여러 다양한 현상들이 두루 담겨 있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진리란 사물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이라고 하면서 이 진리를 쉽게 포착할 수 없는데 오직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idea’라 명명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풀어가면서 결국엔 시인추방론을 얘기한다.

 

그 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예술은 단순히 어떤 외부적 실체를 모방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독자적인 가치 체계와 존재 이유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외부의 실체나 이데아를 모사하기 때문에 모방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어려 형태의 외부 소재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모방 예술일 뿐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는 시고 그림은 그림이었다. 그러다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비로소 시는 그림처럼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또한, 그는 시학에서 경직된 시의 해석이나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경계하고 하면서 시는 그림처럼, 가까이 다가설 때 오히려 그댈 사로잡는 게 있고 어떤 건 멀리 떨어질 때 그댈 사로잡는 게 있다.”고 했다.

 

시는 그림을 그림은 시를 모방, 모사하거나 재현하고, 그림은 시를 기억하고 그림 또한 시를 그리워하는 시와 그림의 관계, 문학가와 예술인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끼치고 하는 것은 역사와 함께하는 것을 많은 경우를 통해 보아왔다.

동양의 예술론에서의 시화일률(詩畫一律) 사상은 북송시대 화가 문인들인 소동파나 황정견 등에 나타난다. 소동파는 왕유의 시화를 두고 시 속에 그림이, 그림 속에 시가(詩中有畵, 畵中有詩)있다고 했다. 물론, 19세기 이후에는 그림은 그림처럼 시는 시처럼이라는 주장 제기되면서 시와 회화의 한계가 있다는 비판적 성찰이 있기도 했다.

 

미술 전시회를 다니면서 많은 걸 보고 느끼는 가운데 유난히 작품 앞에 오랫동안 서 있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에서 시적인 감흥과 영감을 얻는 경우이다. 때론 몇 발짝 떨어져서 감상하기도 하고 가까이서 해석해보기도 한다. 시적인 시선으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그림이나 음악적 시선으로 시를 감상하고 해석해보는 것, 이 또한 시중유화, 화중유시의 의미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꿰뚫어 보는 시선은 때로는 새롭고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시인은 천편일률성과는 극과 극이다. 일상 속 평범함에 갇힌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몸은 일상적이되 영혼은 몸을 떠나 새롭고 낯선 시선으로 꿰뚫으면서 재해석하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선은 이차돈의 흰 피가 순환해서 다시금 계곡물에 흐르는 것을 보아야 하고, 마찬가지로 정몽주의 선죽교 붉은 피 또한 강물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세계에 대한 관점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시나 그림은 사물에 감동하거나 의미를 갖게 하는 인간의 인식 작용에 의해 흥에 취한 표현이다. 그것을 시는 언어로 그림은 붓으로 쓰고 그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흐의 구두를 모방론적인 해석과 느낌으로 본다면 그림은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하는 시골 논밭에서 일하는 촌부의 신발일 뿐이다. 그렇지만, 작품을 특정 해석에 연연하지 않고 보면 그림은 느낌표나 물음표를 건네고 의미심장한 그 무엇인가로 다가온다. 예술작품은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송강 정철의 시가 작품을 보자.

 

잘 새는 날아들고 새달은 돋아온다

외나무다리에 혼자 가는 저 중아

네 절이 얼마나 하관대 북소리가 들리나니.

 

시조의 배경은 어스름 내리는 저물녘이다. 잠자리 찾아 새는 날아들고 먼 산에는 초승달이 솟아오르고 있다. 한쪽엔 외나무다리(獨木橋)가 있고, 그 위에는 바랑을 멘 탁발승 아님, 석장(錫杖)을 든 스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한 폭의 그림에서 어느 절간에선가 울려오는 은은한 종소리가 맥놀이 되어 귓전을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조에서 시는 그림을, 그림은 시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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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이미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