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필자의 고향인 땅끝 해남의 시골에 내려가 밭이랑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캤다. 어렸을 적 그리도 많은 고구마를 캤던 풍경을 반추하며 잠시 밭이랑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고구마 줄기를 뽑는데 차례와 질서도 없이 크고 작은 고구마들이 줄기에 매달려 올라왔다. 흙의 깊은 곳에서 수직으로 뽑힌 게 아니라 옆의 옆으로 올라온 수평적 수확물이다. 그리고 허리를 펴니 바라보이는 것이 밭 끝자락 서 있는 큰 소나무였다.
시골은 어느 논이나 밭을 가게 되든 다양한 농작물을 만날 수 있다. 고구마나 감자도 만난다. 고구마나 감자의 球根(구근)을 보면 대단한 생각이 든다. 구근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체와 접속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영양분을 찾아 촉수를 더듬어 고구마, 감자 등을 맺게 한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의 고원」이라는 드넓고 드높은 고원을 생각하게 된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천의 고원을 넘나드는 공통된 물줄기가 ‘차이와 생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고구마를 캐면서 떠오른 것이‘리좀Rhizome’과 ‘수목(樹木)’, 그리고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다.
‘리좀’은 뿌리줄기이다. 줄기 자체가 나뉘고 갈라지면서 뿌리가 된다. 그러나 ‘수목’은 중심 뿌리가 있고, 중심 뿌리로부터 잔뿌리들이 나온다. 나무(樹木)들이 그렇다.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모든 뿌리가 뻗어 나가는, 즉, 나무의 가지나 잎 등이 하나의 중심인 뿌리로 환원되는 형이상학의 초월적 사유체계가 ‘수목형 사유체계’라면, 중심이 없는 가운데 줄기 자체가 접속하고 관계하면서 각각 뿌리 역할을 하는 것이 ‘리좀의 사유체계’라 할 수 있다.
수목 구조의 반대 개념이 ‘리좀’이다. ‘리좀’은 땅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잔디, 고구마, 감자 등과 같이 수평적으로 연결된 형상이다. 그래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중심도 없다. 주변이 중심이고 중심이 주변이다. 종단하면서 횡단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통섭적인 특징이 있다. 그물과 같은 네트워크를 생각하면 된다. ‘網狀組織(망상조직)’그물망처럼 조직된 다양체이며 다양한 성질의 복합체다. ‘리좀’은 연계와 관계이기 때문에‘그리고’ 등의 접속사로 연결된다. 그래서 리좀적 삶은 출발점도 종착역도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양의 사유는 ‘樹木(나무)’를 모델로 삼아왔다고 한다”이 사유는 항상 중심이 존재하고 연속성의 논리가 관통한다.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 꽃, 열매 등이 있고 좌우대칭의 구조로 질서가 있는 형태이다. 근대사회가 바로 수목형으로 구조화된 사회이다. 엄격한 상하직책의 회사, 군데 조직 등 피라미드처럼 위계적인 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리좀’은 다양한 밭이랑 속 고구마 줄기처럼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여러 현상과 연결되고 접속하면서 탈영토와 하면서 생성한다. 이렇듯 다양체들을 만나면서 변화를 겪으며 재영토와 한다.
필자가 오랜 시간 함께하고 있는 시동인(소새)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또한, 사유의 틀과 세계관, 문학관 등이 각기 다른 다양체(시인)들이 모여 서로 접속하고 연결하며 변화하는 가운데 시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혀간다. 지금의 영토에서 일탈하고 또 다른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막의 유목민이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듯 함께한 동인들의 시에 대한 세계관도 이같이 노마드적 사유로 차이를 횡단하며 새로움을 생성한다. ‘리좀’은 나무뿌리와 달리 어느 곳에서든 다른 곳과 연결하고 접속하듯. 동인의 모임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접속하고 연결하면서 성장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지각할 수 없던 영역의 너머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익숙한 사고에서 날것의 사고로, 탈영토화하여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천지간의 떨림을 찾아서.
시골의 논밭에는 농작물의 성장에 필수적인 물이 필요하기에 水路(수로)가 있다. 그 물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위적이든, 자연스럽든 일정한 폭을 따라 물이 흐른다. 그렇게 ‘홈 패인 공간’의 수로를 따라 흐르기에 다양한 농작물들과 만나지 못하지만, 메마른 논이나 밭에 물길을 내면 이때의 물은 ‘매끄러운 공간’에 빗물이 떨어져 사방팔방으로 흐르듯, 여기저기, 곳곳으로 흐르면서 바짝 마른 벼포기에 파고들고 스며들어 농작물을 새롭게 자라게 한다. 그리고 땅속에 스며든 물은 다시금 대기 속으로 증발한다. 끊임없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한, 정착이 아닌 유목민적이고자 한 것이다. 필자는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의 흐름에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의미를 다소 거칠게 되새겨 본 것이다.
특히 문학에서의 작가는 ‘리좀의 사유’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고정된 주체나 중심이 없는 수평적 사유다. 그렇기 위해서는 수목형인‘수직적 사유’의 옷을 과감히 벗어야 한다.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끝없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리좀의 사유’가 바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리좀(Rhizome)의 사유’는 덩이줄기처럼 문학이나 철학 예술 분야의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의 기타 학문과 연결하고 접속하는 통섭적 사유이다. 정착 생활하는 농부와 유목 생활을 하는 유목민의 사고는 진화해오면서 서로 다른 사고를 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 둘의 사고를 융합하거나 아님, 전혀 다른 돌연변이 같은 사고를 하되 통섭적이어야 한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와 환경이 나를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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