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독서를 할 때 어떤 책은 쉽게 읽히면서 재미도 있고, 어떤 책은 더디고, 이해되지 않는 책이 있다. 여기서 이해가 잘 안 된다는 것은 읽고 난 후 말과 글로써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철학서와 <율리시스> 등의 문학이다. 혹시 잘 이해되지 않는 책들의 저자는 자신의 글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하면서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것에 시시비비를 할 필요도 없고 또한 무의미한 일이지만, 어떤 작가의 책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내 취향에 맞고 추구하고자 하는 같은 방향의 책은 술술 읽히고, 비록 쉽게 읽히지 않더라도 나에게 확 다가올 때는 황홀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책을 읽을 때 라캉의 말처럼 주이상스jouissance를 느낀다.
학교 다닐 때는 어떤 목표에 맞춰 공부하고,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주제, 소제, 핵심내용 등등을 따라 배우고 익힌다. 이럴 때의 독서는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에 창의력은 저 멀리 도망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제도적이고 주입식인 독서를 떠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문장과 문맥 등을 어루만지면서 가볍게 때론, 심도 있게 독서를 해야 한다. 이러할 때 롤랑 바르트가 말한 “귀족적인 독서”의 느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곧, 느릿느릿 읽어야 할 책, 많은 시인과 소설 등, 작가와 예술가를 만나면서 나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책들이다. 예를 들면, 질 들뢰즈, 모리스 블랑쇼, 장자와 노자 등등의 책들이다. 몇 번을 보고 또 보면서 씹어 볼수록 맛있는 책, 그래서 되새김질하면서 잘 소화할 수 있는 책을 말한 것이다. 남다른 시선으로 책을 읽지 않으면 절대로 남다를 시선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같은 책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독자는 때론, 이 책 저 책 마구잡이식 독서를 한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독서의 여행을 즐기게 된다. 바로 이때 눈 마주치는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즐거우면서 뭔가를 깨우치는, 그래서 교육화되고 고정화된 틀을 과감히 깨뜨리면 새롭게 펼친 세계를 만나게 된다. 주이상스를 만나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성과 지향적인 독서가 아닌 주체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박아이문(博我以文), 즉 넓고 깊은 독서는 나의 인격을 연마하는 소중한 방법이다.
독서를 하다 보면, 저자가 사라진 것을 느낀다. 그 어떤 작품도 저자를 떠나면 오로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독자가 그만큼 중요하다. 이렇듯,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독자는 저자를, 저자는 독자를 찾아 나선다. 바로 그때 독자와 저자의 만남이 생긴다. 그 만남의 공간은 오감의 감각을 자극하는 “관능적 공간”이다. 저자는 독자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독자는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독서의 유형과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희열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플레지르(plaisir)’이고 다른 하나는 ‘주이상스(jouissance)’이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플레지르는 육체적 만족이나 쾌락에 가깝다. 우리의 일반적인 감정에 느끼는 희열, 도덕적으로도 거리낌 없는, 영어 pleasure와 비슷하다. 그리고 즐기다는 뜻을 가진 주이상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감정,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은근한 내면의 충족, 충만감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말대로 하면 ‘고통 속에서 느끼는 오르가슴적 쾌락’이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모두 가지고 있다. 나를 죽이고 남근을 거세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린 거세의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우린 제약 받고 통제받을 때 그것을 탈출하고 뚫고 나가려고 하는 이드(id)의 욕구가 있다. 이렇듯 주이상의 개념을 알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바라는 것들을 추구할 때 우린 ‘너는 이렇게 해야 해 Must be’ 즉, 니체가 말했던 “금빛 비늘”을 탈출하고 헤쳐나가면서 쾌락의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
이러할 때 현실 원리가 깨지면서 우리는 자기 쾌락의 저 건너편으로 넘어가서 나의 쾌락을 발산하며 사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우린 인간이 부조화하고 불안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것을 깨트리고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실존적 인간으로서 그것을 깨트리고 나아 갈 수 있는 주이상스의 개념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용의 비늘은 하나하나가 빛난다. 그 비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성, 도덕, 양심 등등이다. 이렇게 집안의 아버지 같은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한다. 그래서 그 앞에 서면 우리의 머리를 조아리게 하고 길을 막아선다. 이제 나의 길을 막고 있는 용의 비늘 하나하나를 거둬들이고 용의 그늘을 벗어나자. 이성과 도덕, 양심 등의 우리가 지키고 안고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우릴 짓누르는 그 거대한 용의 그늘을 벗어던지고 깨뜨림으로써 느낄 수 있는 역설과 모순의 희열, 그 주이상스를 느끼며 나의 길을 걸어가자.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저항하는 사유의 전복인 주이상스, 이것은 언어의 상징을 넘어선다. 용의 비늘인 “금빛 비늘”을 타파하는 독서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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