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작은 방을 서재로 꾸며 놓고, 그 문틀 위에 <學古房>이라는 글을 프린트해 걸어 놓았다(워낙 필체가 없어서 ㅎ). 위의 뜻처럼 호고가好古家도 간서치看書癡도 아니지만, 옛글과 옛것을 좋아함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끔 답사 다닐 때 찾는 곳은 대부분이 옛것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 등을 위주로 많이 다녔던 것 같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답사지에 가서 외형적인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면 형상 너머(境生象外)에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색을 하든, 순간적이든 다산에게서 배웠던 ‘수사차록隨思箚錄’과 ‘묘계질서妙契疾書’의 독서법을 답습하곤 했다. 그러한 결과물로 오래전 어느 곳에 발표했던 기행문 끝에 이렇게 갈무리했었다. “어느 분이, 孔子, 孟子처럼 우리나라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의미의 ‘子’를 붙일 수 있는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라고 한다. 역사기행을 마치면서 나도 정약용 선생님을 ‘丁子’라고 부른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최고의 학자이면서 사상가이며 탁월한 시인이었다. 당시 조선 후기에는 중세 체제가 무너져가고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때였고, 진보적 학자들의 활약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중심의 위치에 섰던 그가 이룩한 학문적 업적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지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등의 남인 계열의 명사 300여 명이 처형되는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그의 형 정약전과 다산은 유배를 간다. 그리고 다산은 강진의 사의재(四宜齋) 및 다산초당(茶山草堂) 등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며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주변 환경이 한 사람의 정체성 확립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다산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은 고산 윤선도, 소쇄옹 양산보, 백호 임제, 면앙정 송순 등등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다송을 지은 草衣 의순과 잦은 만남에서 차의 삼매경에 빠졌을 것이고 백련결사로 유명한 사찰인 백련사의 주지 스님 혜장(惠藏)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다산초당엔 4경이 있다. 다산이 솔방울로 불을 피워 차를 달였던 ‘다조茶竈’와 초당 뒤편의 ‘약천藥泉’의 샘물. 그리고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있으며 해배(解配)를 앞두고 흔적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초당 뒤 바위에 친히 새긴 ‘정석丁石’의 두 글자가 있다.
며칠 전 토요일, 남양주의 실학박물관에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시낭사(詩朗人)의 모임에 우연한 기회에 함께 하게 되었다. 비와 눈이 동시에 내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 시를 쓰고 낭송하시는 그분들의 열정에 감동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필자의 마음 한쪽엔 또 다른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것은 다산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참여의식과 실사구시적 삶 속에서 시를 쓰고 낭송하는 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500여 권의 한우충동(汗牛充棟)의 많은 저술을 했다. 그는 실학의 대가답게 자신의 저술을 통한 사회 현실의 실천을 위해 진실 된 앙가주망Engagement의 의지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건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참여는 매우 중요하고 그에 따른 실천적 행위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1992년 빵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세르비아의 민병대가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인해 22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때 첼로를 꺼내 들어 22일 동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하며 그들을 추모했다. 그가 바로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우크라이나에서 음악가 데니스 가라체브체프는 파괴된 건물과 아파트 사이에서 바흐의 첼로 무반주 조곡 5번 C단조 프렐류드(Bach Cello Suite no 5 in C minor BWV 1011, Prelude)를 연주해서 전쟁의 화마에 힘들고 지친 시민들을 위무하고 안아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극단적 대립이나, 노사의 갈등, 계층의 갈등, 도시와 시골 등, 차이와 경계의 중심에서 첼로의 선율이 아닌 인간의 심장에 우러나온 목소리로 극과 극으로 치닫는 양극단의 차이를 횡단하는 낭송을 예술가의 입장에 서서 한다면 악기인 첼로보다 인간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렇기 위해서는 청자의 몸속에 감정이입의 기제를 자극하여 관객 스스로 읊조리게 한다면 갈등과 차별의 갈라진 그 틈새를 확실히 메꿔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장에‘시낭사(詩朗人)’의 읊조리는 선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들지만 실현 가능할 것이다. 大同의 세계를 이루고 어울림을 위한 화해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방법인들 대수이겠는가. 시속에 들어가 시의 음성으로 낭송하면 상처가 미소가 될 것인데. 낭송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필자의 짧은 소견임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시낭사(詩朗人)는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의 정신에 하나의 청심제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타는 목마름의 나에게 네가 물 한 방울 같은 낭송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화음이 되겠는가. 그렇기 위해서는, 나보코프가 말한 것처럼 여러 겹의 의식이 필요하다. 시와 미술 등의 인문학교육을 받은 그의 기억과 사고는 다중감각적이었으며 감정적인 동시에 지적이었다. 새겨들어야 할 얘기 같다.
회원분 중에 ‘애절양(哀絶陽)’의 시 낭송을 감상했다. 그것도 다산의 생가 앞 열수가 흐르는 두물머리 강변에서이다. 애절양이 어떤 시인가? 말 그대로 남자의 생식기까지 잘라야만 했던 가혹했던 조선 후기의 부패한 사회의 부조리를 참담한 심정으로 읊조린 시가 아니던가. 낭송을 시작하니 흐르던 열수의 강물도 잠시 멈춰 기도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비마저 허공에 매달려 묵념을 했다. 그리고 날던 새가 죽지를 접고 곡哭을 했다. 때론, 이렇게 시 낭송의 깃털에서 레퀴엠도 듣는다.
여유당(與猶堂 : 여혜약동섭천與兮若冬涉川 유혜약외사린猶兮若畏四隣) 앞 강변에서 여유餘裕를 갖지는 못했지만, 애절哀絶함을 느끼면서 만사의 상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차 속에서 다산의 음성을 들었다. 실사구시!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나의 인문학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과 예술, 고난과 역경에서 피어나다. (0) | 2022.11.07 |
---|---|
에로티시즘, 혜원 신윤복과 에곤 실레를 통해서 본 (0) | 2022.11.03 |
독락(獨樂), 홀로됨을 즐기다. (0) | 2022.10.31 |
잉여인간(剩餘人間), 누가 잉여 인간일까? (0) | 2022.10.18 |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에서 인드라망을 보다. (1) | 2022.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