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삼강체(三江體)*로 쓴 외상장부/홍영수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1. 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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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문을 열면 연기에 그을린 벽지에는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삼강체의 상형 문자가 그려져 있고

노 젓던 사공의 슬픈 가락과 보부상의 총총걸음의 외상값이

지우고 다시 쓴 가느다란 칼끝의 필획으로 쓰여있다.

연기에 그을린 정기의 벽에는

주전자 연적의 텁텁한 물을 뚝배기 벼루에 붓고

간간하게 배인 소금장수 땀의 먹으로 갈아 쓴

행간 속 외상장부가 농담의 붓으로 괴발개발 갈겨놓았다.

시끌벅적한 삼강주막에서

고단했던 그들이 하루를 안주 삼아 피로를 마실 때

늙마의 주모는 비워지는 주전자의 개수를 벽지에 새긴다.

칼끝 붓으로 휘갈긴 갈필의 메마른 삶일지라도

자오록한 연기에 그을린 먹빛 정지에서는

삼강체라는 주모만의 서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앞치마처럼 구겨져 힘들고 고된 하루지만

그만의 운필력으로 붓을 잡고 보리문장을 쓴다.

허리가 아픈 늙은 주막의 정지문도 눕지 않고

연기 또한 벽지에 쓰인 서체만큼은 그을리지 않는다.

그을린 벽의 비밀 노트에 쓴 삼강체는

애옥살이하는 주모만의 문자로 표현한 그림이고 삶의 리듬이며

사그라지지 않는 불빛 희망이고, 순수의 낙관이다.

 

 

*삼강체(三江體):삼강주막의 주모가 칼끝으로 부엌 벽에 표시한 외상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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