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는 생각에 따귀를 때려라
어느 날, 남한강변을 지나가다 우연히‘사각하늘’이라는 카페의 이름이 눈에 띄어 호기심에 쉬어갈 겸, 그곳에 차를 멈췄다. 왜‘사각하늘’일까 라는 궁금증이 발동해서 카페 쥔장께 물었더니 말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을 올려다보니 지붕 한가운데가 사각형으로 되어있었다. 하늘이 사각으로 보였다. 순간, 골수를 치고 들어오는 뭔가에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쳐다봐도 사각 하늘이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배웠는데(天圓地方) 말이다.
그리고 따라 놓은 물컵의 물을 마시며 창문 밖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고개 들어 다시 한번 하늘을 보는데 여전히 사각의 틀 속엔 둥근 하늘이 아닌 사각의 하늘이었다. 잠시 눈을 돌려 컵 안의 물을 바라본다. 물은 잠든 듯 고요하고 정적이 정적을 안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제도화되고 체계화된 생활 속 삶들을 떠올리며, 나 또한 생활의 컵이라는 틀 안에 갇혀 부패하고 썩어가는 생각의 고인 물이 아닐까 되새겨 보았다.
고인 물은 흐르는 물의 세계를 모른다. 바로 옆 계곡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 물은 남한강 물과 만나서 두 물은 인천 앞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이곳저곳, 여기저기에서 흐르는 물은 어디서 오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류한다. 양수리 동네의 두물머리처럼. 물의 만남은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난 후 지린내 나는 소변과 선죽교 정몽주의 붉은 피. 순교했던 이차돈의 흰 피와도 만났을 것이다.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이렇듯 고인 물은 물속에서는 오직 자신의 그림자만 볼 수 있지만 흐르는 물은 물속에서 멈춘 그림자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다양한 객체들을 만나 함께 흐른다. 넋이 나가 죽은 듯, 멍 때리고 있는, ‘멈춤’, ‘고임’, ‘안주’라는 생각에 실컷 뺨을 때리자. 도끼로 내리치며 깨부수어 ‘흐름’ 의 파문을 일으켜 생각을 파도를 일으키자. 그래서 원효, 정몽주, 이차돈의 정신을 만나자. 확장된 사유는 멈춤이 아닌 나아감에서 발현되고, 사유의 전복은 창조적 생각 너머의 결과물이다.
꽉 막힌, 꽉 닫은 생각의 쪽박을 망치로 깨부숴야 한다. 그래서 사유의 지평을 새롭게 추구해야 한다. 깨우침이란 때론 예고 없이 뺨을 맞는 순간 확 다가온다. 고정된 인식의 틀을 깨자, 그래서 융합적, 통섭적 사유의 틀을 마련하자. 정형적인 틀 안에서는 사고의 싹을 틔울 수 없다. 마음과 영혼을 뒤흔들고 전복시키는 사유의 틀을 확장해서 종합지적인 사고의 틀을 마련하자. 그렇기 위해 넋 놓은 생각에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자.
무언으로 서 있는 바위나 돌덩이에 망치와 정으로 뺨을 후려치면 조각작품이 된다. 굳은 땅엔 물이 스며들기 힘들다. 딱딱한 생각의 밭을 말랑말랑하게 적시는 방법은 빗물이라는 죽비가 스며들어야 한다. 그 적셔진 밭에서만이 씨앗은 발아한다. 젊은 시기보다는 나이 듦에서 오는 사유의 성격은 견고한 대리석이다. 그래서 견고하고, 틀 안에 갇힌 사고에는 한 손이 아닐 두 손바닥으로 뺨을 때려줘야 한다.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선, 회전하지 못하고 정지된 생각엔 전진과 회전은 기대할 수 없다. 언제든 멍 때리고 있는 그러한 생각에 뺨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언제 맞을지 모를 뺨을 위해 온종일, 아니 매 순간 긴장 속에서 준비하고 있어야만 때린 뺨의 아픔 너머 의미를 알고 느끼게 된다. 진정한 삶은 무지를 깨닫는 삶이다. 그렇지 못한 삶은 사회생활 속에서‘움직이는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태풍은 잠든 바다를 일깨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천둥 번개와 벼락은 만물의 얼굴에 따귀를 때리며 긴장을 하게 한다. 또한, 은사나, 친구, 선, 후배 등의 관계에서 가슴팍을 후비는 한 마디에 생의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그리고 시 한 구절에서 얻는 번뜩이는 영감은 누운 사유를 번쩍 일으켜준다. 이 모든 것들이 뺨을 맞는 순간의 깨달음이고 새로운 가치의 발견이다.
아직도 컵 속의 물은 고요하고 잔잔하다. 파문이 없다는 것은 죽음이다. 사각의 틀로 보면 둥근 하늘도 사각으로 보인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관점의 전복이고 이치를 깨닫게 하는 사고의 발견이다. 멍 때리고 있는 생각에 파문이 일어야 한다. 그 파문은 수면의 정적을 깨뜨리며 뺨을 때리는 돌멩이듯이, 잠들어 깨어나지 못한 생각은 기상나팔로 뺨을 때려 깨워야 한다. 그때는 눈 비비고 벌떡 일어나 여명의 빛을 볼 것이다.
‘사각하늘’카페에서 컵 속에 고인 물을 보고, 멍 때리며 살아온 생각의 얼굴에 뺨을 맞고, 핑 돌며 일어서는 순간엔 아랫도리를 후리는 도리깨질을 당하는 시간이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바다를 향해 강물은 흐르는 중이다. 정적인 사유는 꽃망울에 머물 수 있지만, 동적인 사유는 꽃망울을 터뜨린다.
어느 날 밤,
누군가와‘생각’의 술잔에‘뺨’의 술을 따라 실컷 마시고 싶다.
생각을 아껴 쓸 생각을 하지 말자.
[홍영수 칼럼] 멍때리는 생각에 따귀를 때려라 - 코스미안뉴스
어느 날, 남한강변을 지나가다 우연히‘사각하늘’이라는 카페의 이름이 눈에 띄어 호기심에 쉬어갈 겸, 그곳에 차를 멈췄다. 왜‘사각하늘’일까 라는 궁금증이 발동해서 카페 쥔장께 물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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