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반란.

홍영수 시인(jisrak) 2023. 9. 25. 19:08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상대를 배척, 폄하, 격퇴 시키려고 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밀어내며 관계하지 않으려는 가치 전도에서 우린 과연 그 어떤 타협과 협치를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당쟁과 사화士禍를 보면 삼족을 멸하고, 유배 보내고 숱한 백성들은 피로 물들고 피폐해져 갔다. 동인은 서인을, 서인은 남인을 죽이면서 대북, 소북 등의 끊임없는 살육이 자행되었다. 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귀양, 유배 보냈다. 오죽했으면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고 했겠는가. 이러한 일이 왕권과 관계를 맺었기에 일어났다고 할 때, 과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면 괜찮다는 것인가? 특히 사회적 지위에 있고 지식인층이라면 말이다.

 

담양지방 정철의 유적지와 해남과 보길도의 윤선도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그들이 읊은 시가 결코 자연 예찬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의 검은 정치적 상황이 시구의 은유와 상징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연으로 돌아감은 자신들을 합리화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식인 아니, 그 시대 선비들의 서글프고 초라한 은둔의 미학이 워즈워드가 자연을 읊조린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은 글로벌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전 지구를 넘나들며 관계를 맺고 너 없이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역으로 너와 나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우린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면 나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진정한 나라는 존재, 즉 자아를 확립할 때 상대 또한 진정한 상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도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라고 했듯이 모든 삶은 만남, 즉 관계 맺음이다. 자아 없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란 나와 너라는 상대적 관계라는 것이다. 이렇듯 귀양 가고 유배를 떠난 선비들이 자아를 가지고 당 시대와 현실을 인식하면서 관계를 맺었다면 비극적인 당쟁과 사화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상대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오직 흡수나 아예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절대복종의 왕권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소위 중세 Dark Ages(암흑의 시대) 때는, 그들은 신과 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 인간을 부정하고 오직 절대적인 신만을 위한 생각 섬겼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인간성을 말살했다. 나 없는 나로 오직 신을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가 죽어버린 컴컴한 밤이 무려 천 년 동안 이어졌다. 이러한 어둠의 밤에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모리배들의 목을 베고 황토현의 횃불을 치켜들었듯 자아의 횃불을 켜는 문화운동이 바로 타오르는 불꽃, 르네상스였다. 그것은 자아를 발견했기에 가능했다. 바로 신에 대한 절대복종이 아닌 신과 나의 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우린 외부와 타인과 부딪칠 때 장벽을 만나고 좌절을 겪게 되면 어떤 정감이 생기면서 난파의식難破意識을 갖게 된다. 바로 이때 흐릿했던 눈을 뜨게 되고 본래적인 내면으로 들어가 심연에 잠든 지성이 깨어난다. 데카르트 말처럼 고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다. 이러한 사고와 자기 성찰, 부단한 비판 의식에서 자아가 확립되고 성장할 수 있다. 그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참여할 때 자아의식이 싹틈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은 자아의식이 뚜렷한 지식인이 필요한 시대이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순응하지 않고 꾸준한 의문부호를 가지고 부단히 비판하면서 현실과 상황 밖에서 바라보는 지식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통제하고 억압하는 공간에 있는 사람은 그 안의 숨 막히는 탁한 공기의 상황을 모른다. 그것은 그 밖에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처럼 지식인은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한다. 왜냐면 인사이더의 모든 행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른 길로 가는 방향을 알려줘야 한다. 이렇듯. 시인이나 철학자 등의 지성인知性人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군인이나 정치가 등의 공작인工作人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는 다른 존재여야 한다.

 

이처럼 지식인은 알렉산더 대왕의 내민 손을 물리친 디오게네스의 현실 밖의 통을 마련해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옛적의 뭇 선비들처럼 현실 밖에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현실 안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지식인은 현실 밖에 존재하면서 국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와 내가 함께 살 수 없는 사회는 공포스런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절대 권력으로 너와 나를 편 가르고 분리하는 것이 독재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때, 만약 당대의 현실이 그렇다면 지식인은 항시 국외자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지식인들은 조국을 위해 더 나아가 조국을 초월해서 비판하고 항거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마시는 일상적 세계의 맞은편에는 정신적인 세계가 있다. homo faber는 휴화산의 외형만 보지만, homo sapiens는 깊은 지층에 끓고 있는 마그마의 숨 소를 듣는 자들이다. 그래서 때론, 지식인들은 그 두꺼운 지층을 뚫고 반란의 마그마와 횃불이 되어 끓어 넘치고 솟구쳐야 할 때가 있다. 그 뜨거운 열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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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4회 한탄강 문학상 대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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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인류의 진화

 

https://www.cosmiannews.com/news/24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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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상대를 배척, 폄하, 격퇴시키려고 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밀어내며 관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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