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미네르바의 老人은 황혼 녘에 巨人의 날개를 편다.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0. 1. 10:43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철학자 헤겔의 저서 <법의 철학> 서문에 나온 말이다. 진리탐구나 철학은 어떤 사건에 선행하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와 수많은 지혜를 갈고 닦음 끝에 비로소 늦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부엉이는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다. 서양에서는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다. 즉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는 해 질 녘에 활동하듯 지혜도 모든 일이 끝날 무렵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인간 또한 황혼이 깃들 무렵에 비로소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의 여행이 좋다. 왜냐면 풍성한 나뭇잎들의 웅성거림도 좋지만, 잎새를 떨궈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의 기하학적 문양과 빈 가지 끝의 진양조장단의 홀로된 읊조림이 좋아서이다. 어느 해 늦가을, 지리산 둘레길을 아내와 함께 걸었다. 남원의 매봉마을에서 걷기 시작해 등구재를 넘으니 함양군이다. 첫 번째 창원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정자나무로 보이는 커다란 두 그루의 거목(정자나무)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앉아 계신 두 분, 할머니 할아버지다. 둘레길을 함께 걸어온 노부부이다. 고목과 노인은 닮아가는 것일까? 커다란 巨木老木巨人老夫婦가 겹치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저 노목은 더 이상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에서 잘 익은 씨앗을 발아시켜 멀리 보내기 위해 기다리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멀리 날려 번성을 한다. 노부부 또한 오랜 세월 속 과부하 걸린 뼈의 뒤틀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오직 자손들의 건강과 좀 더 나은 생활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숙성된 세월에서 오는 細長(세장)하고 유약한 신체임에도 선 뜻 다가설 수 없는 아우라와 보이지 않는 힘을 느끼게 된다.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덜어내어 빈약하고, 비워서 텅 빈 듯한 몰골의 얼굴처럼 노부부의 얼골 모습에서 왜 저리 아름답고 가슴 조이게 하는 비장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허황한 치장도, 그 어떤 위선도 없이 그 당시의 시대적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그 어떤 위기와 생의 흔들림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만의 푯대를 세우며 살아온, 저 고목과 그 아래 노부부. 나무는 비바람과 해와 달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뭇잎을 다잡아 왔듯,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논두렁과 밭두렁에서 벼 익는 소리와 고구마 커가는 소리를 들으며 견뎌 오셨다. 이러한 저들의 삶 자체가 철학이고, 사상이 아닌 그 무엇이겠는가

 

나무가 크고 뿌리 깊어지려면 커다란 물줄기가 필요하다. 바람과 비, 때론 차가운 한풍(寒風)과 폭설(暴雪) . 이렇듯 저들 또한 스스로 위함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피붙이를 위해서는 태풍과 홍수, 냉해 등과 함께 부딪치며 이겨내야 함은 물론이다.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듯 저들도 논밭 속에 사랑의 씨앗을 깊숙이 뿌리내리게 가꾸었을 것이다.

 

홀로 깊이 선 커다란 고목, 살아온 연륜만큼의 무게로 든든하게 서 있다. 차라리 격조 있는 우아미를 느낀다고 해야 하나? 마찬가지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새벽녘 여명의 햇귀도 좋지만, 저물녘 황혼의 노을 또한 얼마나 장엄한 아름다움인지를 느끼지 아니한가? 자식들 먹여 키우느라 歲寒과 모진 風波를 겪고 이겨내며 논틀밭틀길 오가며 곡식의 열매 익는 소리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비록 생의 봄과 여름은 지났지만, 열매의 계절 가을을 맞이한 저 노부부의 표상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 꿇어 절하고 싶고, 무심코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고 싶은 것은 비단 필자뿐이었을까? 거룩하고 근엄한 삶 앞에 차라리 숭고미를 느꼈다.

 

거목과 노부부가 어떻게 자라왔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고찰은 하지 말자. 저들 앞에서는 침묵하자. 말을 하고 설명을 하면 이미 눈앞의 것만 보고 느끼게 된다.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너머의 침묵하는 의미를 찾아보자. 지각하고 감각하는 그 너머의 의미를 찾자. 그때 보이는 것이 진정하게 보는 것이다.

 

또한,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자 그래서 자신의 감각 능력과 지각 능력을 뛰어넘자.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고 볼 수 있는 것만 본다면 나의 오감에 익숙한 것만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고목의 오랜 세월 속 비바람을 견뎌 온 그 생명력만을 보는 익숙함과 나이 드신 분들의 흰 머리카락과 굽어가는 등, 주름 속 의미만을 바라보고 안타까워만 하는 해석을 하지 말자. 그래서 지금의 감각과 지각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자. 그때 나무인 巨木과 사람인 巨人이 보일 것이다.

 

거목이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굳건히 제 자리에 서 있듯,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어둠은 어둠으로 거둬들이고 자식 농사를 농사짓듯 키워온 노부부, 고목이 고목인 까닭은 인고의 결과이듯 老人巨人인 이유는 인내의 또 다른 이름에서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아오른다. 정작 이 시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누구일까? 살아 움직이는 나이 든 황혼의 침묵, 늙어 가고 사라지며 저물어가 가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쉬고 있는 정자나무가 동네 뒷산을 업고 있다. 노부부의 굽은 등은 고독을 짊어지고 있다. 그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 존엄한 숭고미다. 그리고 두 분이 주고받는 눈빛 언어는 존재의 이유다.

 

 

[홍영수 칼럼] 미네르바의 老人은 황혼 녘에 巨人의 날개를 편다. - 코스미안뉴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철학자 헤겔의 저서 <법의 철학> 서문에 나온 말이다. 진리 탐구나 철학은 어떤 사건에 선행하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와 수많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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