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연암의 까마귀 날개에서 모네의 빛을 만나다.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0. 1. 10:47

 

출근길, 전철역에 하차해 계단을 오르면 길냥이의 쉼터가 있다. 누군가 빈 양푼에 먹이를 가득 채워 놓는데 고양이가 없을 때는 주위의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 먹이를 훔친다. 훔치기 전 소공원의 광장에 모인 일백여 마리의 비둘기들을 어느 날, 출근길 아침에 살펴보았다. 그날은 유난히 비둘기 날개 빛이 반짝거릴 때와 움직일 때,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빛이 다른 것이다. 순간, 집에 가서 책장의 <연암집>을 다시 꺼내 읽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모네를 떠올리며 그 장소를 떠났다.

 

몇 년 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5,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모네, 빛을 그리다의 전시회를 갔었다. 이 전시회는 일반적인 그림 전시와는 다르게 컨버전스 아트(convergence art), 즉 디지털 기술과 그림이 만나서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전시회였다. 천천히 둘러보며 감상하고 느끼며 생각 줍기를 하는 전시회에 익숙한 나에겐 좀 생소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모네의 전시회에서 보는 작품들에서는 풍경 속 사물을 바라볼 때 기존의 관습적 시각이 아닌 순간 포착의 찰나적 스냅사진처럼 현장감 있고 실감이 나는 사진을 보는 듯했다. 특히 문학, 예술인은 순간의 포착의 순간들을 작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 순간 속에서 시인은詩眼을 떠 올릴 수도 있고,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것에서 영원성이라는 예술작품을 빚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 특히 모네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빛을 포착해서 자연상태의 인상을 정확하게 화면에 옮겨 놓은 소위 순간성이라는 예술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연작 시리즈인 <건초더미>, <포플러>, <루앙 대성당>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아침, 저녁, 낮 그리고 해 질 녘 석양을 시간과 순간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해 가는 빛의 찰나적순간성을 화폭에 옮겨 그렸다.

 

출근길 비둘기 날개에서 생각났던 연암 박지원의 산문 <능양시집서(菱陽詩集序)>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아아! 저 까마귀를 바라보자. 그 날개보다 더 검은 색깔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햇빛이 언뜻 흐릿하게 비치면 얕은 황금빛이 돌고, 다시 햇빛이 빛나면 연한 녹색으로도 되며, 햇빛에 비추어보면 자줏빛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눈이 아물아물해지면서 비취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푸른 까마귀라고 불러도 옳으며 붉은 까마귀라고 불러도 역시 옳을 것이다 (……)”

 

이렇듯 연암은 까마귀가 검다라고만 생각해 왔던, 견고하고 단단한 석고상 같은 우리의 생각을 불도저로 밀어 넘어뜨린 것이다.( 물론, 연암은 이 글을 통해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를 비판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그리고 이백과 두보를 숭상했던 선비들의 고정관념과 한계점을 亞流(아류)라고 한 것이다.)

 

모네라면, 초록 까마귀, 붉은 까마귀, 푸른 까마귀의 연작물을 화폭에 그렸을 것이다. 모네나 연암은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고정된 시각, 주관적인 눈, 주입식 교육에서 오는 시험의 답안지 같은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의 시조에서 이미 우린 학창 시절에 까마귀는 검다라고 배웠다.

 

이렇게 주관적인 사고의 반복과 습관의 상자에 갇힌, 이러한 개인의 경험과 특수성이라는 경향의 오류들이 바로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 경우들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실 속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만을 보는 맹목적인 편견의 우물에 갇힌 개구리에 불과하다. 우물만이 나의 세상이고 전부인, 그러한 우물에 터를 잡고 桃園(도원)의 세계를 만난 듯, 착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개구리 같은, 그래서 넓은 바다를 보지 못한 認知不調和(인지부조화)의 잘못된 편견들을 떠올리며 연암과 모네, 그리고 출근길에 만난 비둘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특히 문학과 예술인들은 현실 속 다양한 사물들을 만나 경험하고 체험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 속 개인의 의견이나 편견 또는 선입견 등으로 인식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념의 사고 등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동굴이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했듯이 장자 또한, <소요유>에서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혜고부지춘추蟪蛄不知春秋)”고 했다. 왜냐면, 여름만 사는 곤충인데 어찌 봄과 가을의 계절을 알겠는가.

 

항상 보는 시각으로 사물을 본다면 다르게 볼 수 없다. 새롭게 본다는 것은 다양한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곰팡이 핀 생각의 늪지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사물 밖으로 나타난 여러 가지를 현상을 최대한 정확하고 세밀하게 고찰해서 기술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현상 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것을 찾아내어 손에 쥘 수 있다.

 

18세기 독일의 괴테와 조선의 다산 정약용이 통했듯이, 출근길 전철역 출구의 비둘기를 보는 찰나적 순간에 굳어 있는 사고의 고요가 깨지면서 연암과 인상파 화가들, 더 나아가 시대를 뛰어넘어 장자와 프랜시스 베이컨을 만났다.

 

[홍영수 칼럼] 연암의 까마귀 날개에서 모네의 빛을 만나다 - 코스미안뉴스

출근길, 전철역에 하차해 계단을 오르면 길냥의 쉼터가 있다. 누군가 빈 양푼에 먹이를 가득 채워 놓는데 고양이가 없을 때는 주위의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 먹이를 훔친다. 훔치기 전 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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