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견뎌냄’의 숭고, 나무의 뿌리

홍영수 시인(jisrak) 2024. 4. 29. 18:16

강진의 다산초당 가는 산길을 걷다 보면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만난다. 나무뿌리는 커다란 벌레들이 뒤엉켜서 기어가고 꿈틀거린 듯한 모습들이다. 예전에 설악산 울산바위 가는 숲길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어느 산길에서나 자주 볼 수 있는 뿌리의 길을 보면 어디론가 자신의 삶을 위해 여러 갈래로 뻗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의 길이란 사람이나 나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뿌리는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고 피할 수 없으면 감싸면서 물을 찾아가는 걸 보면 지극히 예술적 감각을 소유한 식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반 고흐는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나무뿌리>를 그려서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왜 그랬을까? 비록 자신의 육체적 생을 마감할지라도 영혼만큼은 살아서 끝없이 대지에 뿌리를 뻗고 싶은, 그래서 숨 쉬고 싶어서 그러하지는 않았을까.

 

나무에게 뿌리는 생명이다. 그래서 그 뿌리는 줄기와 가지와 나뭇잎을 이룬다. 뿌리는 바위 틈새를 비집고 그것마저도 힘들 때는 차라리 바위를 감싸 안고서 물길, 살길을 찾는다. 어느 해 폐사지인 원주의 거돈사지를 답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이 바로 커다란 느티나무였다. 천년인 사찰을 수령 천년의 세월로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절터 모서리에서 사라지고 허물어진 사찰을 끝까지 지키려는 자세로 꼿꼿이 서 있다. 그렇기 위해서 뿌리는 커다란 바위를 피하지 않고 꼭 안고, 보듬고 있었다. 이처럼 느티나무에게 뿌리는 삶의 근간이고, 생명줄이며 또한, 홀로 외로이 인고의 뿌리로 사찰의 흔적을 기록하는 역사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상징과 은유의 뿌리로. 평생 커다란 고목이 되어 나를 감싸고 껴안아 줄 것 같았던 부모님. 우러러봐도 높이와 넓이를 알 수 없었고, 그 깊고 넓은 영혼과 육체의 품으로 내면 깊숙한 나의 영과 육에 지금도 아니, 영원히 뿌리로 뻗어 있다. 때로는 사람과 짐승의 발에 밟힐 때 상처와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아픔을 말없이 견디면서 밑받침이 되어 주며 힘껏 밟고 나아가라고 했다. 엄동설한, 삼복더위에도 쉼 없이 뻗고 뻗어야만 했던 고목처럼 말이다.

 

고흐의 나무에 관한 작품들을 보며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색채로 묘사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멈춤이 없다. 천만년으로 버틴 바위도 마모되어 간다. 깊은 삶의 해저까지 뻗쳐있는 뿌리 또한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 고목도 쓰러지고 부모님도 가시듯 말이다. 그렇게 쓰러지고 떠날 줄 뻔히 알면서도 뿌리를 뻗고 뻗어야 하는 것은, 그 순간이 아닌 영원성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버지, 어머니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사실 나무는 구조가 복잡한 생명체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뿌리는 물을 찾아 흙을 뚫고, 가지는 햇빛을 따라 하늘로 향한다. 이런 카오스적인 구조 속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화가는 고심할 것이다. 아니 이러한 복잡성과 혼돈의 성향 때문에 고흐나 몬드리안도 고심했을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에는 “''라고 하는 것은 形而上의 나이지 形而下의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지 속에 묻히고 숨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은 형이상이기 때문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식목으로 치면 뿌리이다. 나뭇가지나 잎은 가 아니고 뿌리. 비록 보이지 않은 뿌리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쩜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의 코어가 아닌가 싶다.

 

산을 오르는 수십여 년 동안, 등산길에서, 둘레길에서, 어느 시골의 정자나무에서 보았던 무질서의 질서로 노출된 나무뿌리에서 견뎌냄의 미학을 배웠다. 어디선가, 또는 화랑에서 본 나무뿌리와 관련한 작품에서는 견딤의 미학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님의 부르튼 살결과 주름 등을 실제 보고 느끼는 것과 사진 속에서 보는 것과는 천양지간 차이가 나듯이 말이다

 

<용비어천가>에서 보듯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휠세라고 했듯이 나무가 나무로 설 수 있는 것은 대지 깊숙한 곳까지 천착해서 버텨주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한 가지도, 바람에 팔랑이는 나뭇잎도 근본은 뿌리다. 뿌리는 그 어떤 환경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스스로 살아야 할 대안을 찾을 뿐이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묵묵히 평생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식을 위하는 부모님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이렇게 뿌리 깊은 나무부모을 보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커다란 고목 앞에서는 나이 듦, 노쇠함이 아닌 하나의 사유하는 문학작품, 감성의 예술작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칸트의 행복의 조건을 보자.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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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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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 가는 < 뿌리의 길> 사진/홍영수  2013/03/29. 

 

https://www.cosmiannews.com/news/173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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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다산초당 가는 산길을 걷다 보면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만난다. 나무뿌리는 커다란 벌레들이 뒤엉켜서 기어가고 꿈틀거린 듯한 모습들이다. 예전에 설악산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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