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아홉 굽이에서 보이는 실존의 고독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0. 6. 11:56

말 그대로 명상의 방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엄숙함에 앞서 철사 가닥같이 삐쩍 마르고, 거센 입김으로도 금방 부러질 것 같은 키 큰 사람이 걷고 있었다. 아니 존재의 본질이 걷고 있었다. 삶의 얽매임과 끈으로부터의 자유를 직시하고 벗어나려는 듯, 눈빛은 유독 빛나고 마른 갈대 같은 신체에 비해 발은 두꺼웠다. 심한 고통과 비극적 상황 묘사 등에서 육체의 살과 수분을 증발시켜 얻은 자코메티의 실존적 작품, 한가람 미술관에서 만난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이다. 그리고 이 조각상을 보는 순간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의 그뤼네 발트 작품 갈비뼈가 튀어나온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그림이 생각났다.

 

관람을 끝내고 전철 안에서 시골에 계신 九旬(구순)老母(할머니)가 떠올랐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과 동일성의 미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가 양감을 덜어내고 지우면서 인체의 골격을 통해 은유적 표현을 활용한 실존주의 조각의 지평을 열었다면, 가늘어지면서 비워내어 텅 빈 구순의 깡마른 노모는 메타포로 조각된 절대고독의 실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순의 노모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신도 아니고 운명도 아닌, 노모 자신일 뿐이다.

 

자코메티는 아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숭고함을 표현하려고 했듯이, 구순의 할머니 또한 보이는 대로, 아는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 그렇게 살아 계신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거기엔 존재의 무게감이 깃들어 있다. 그 연약하고 가벼운 비움의 철학에서 자코메티는 존재의 본질을 찾았듯, 구순의 노모 또한 끊임없는 지우기와 비우기의 과정에서 본질적 존재로 온몸이 조각되었다. 일부러 조각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이 조각된 것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면 무게가 없다.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가벼워 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가 실존주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자세라면 여기, 텅 빈 시골집에서 평생을 비우고, 지우고, 버리고, 걷어내고 난 저 숭고의 가벼움을 보자. 작품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텅 빈 조각작품이 되어가고 있다. 90년 세월을 넘도록 깎아내고 덜어내면서 말이다. 이 모습을 바라보면 종교의 절대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곁에서 지켜보는 행위 자체가 기도가 되고 명상이 된다.

 

무엇이, 얼마만큼의 삶의 무게가 노모의 영혼과 육신에 올가미를 씌웠겠지만, 구순의 할머니에겐 오히려 고독과 외로움은 비참하기보다는 감추고 싶은 존엄성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을 승화시킨 결정체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덜어내고, 비우고, 깎아 낸, 그래서 미라처럼 되어 홀로 외로운 노모 앞에 자코메티의 실존주의적 작품이 겹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몸은 가느다랗고, 벼와 보리 이삭을 짊어진 등은 구부러지고, 어둑새벽부터 산그리메 내려올 때까지 논밭을 오갔던 발가락은 오므라들었다. 수행과 고행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해탈의 세계인 듯 살집은 흔적이 없고 뼈만 남은석가의 고행상을 닮은 구순의 노모. 그렇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지금도 지문처럼 찍힌 그 논밭 길을 영혼의 발은 걷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라는 언어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살아온 삶에 대해 변명하지도 않는다. 사위어갈 뿐이기에.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전시장에서 보았던 자코메티의 글이 생각난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구순의 노모는 걸어야 했다. 왜냐면, 깨물어 아픈 손가락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놓아버린 늙으신 부모님의 초상, 그토록 강함은 어디 가고 말라서 기운 없고, 가족을 위해 팔팔 끓는 열정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노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뎐져져 있는 존재로서 지금은 온몸에 적요를 이불 삼아 큰방에 홀로 드러누워 지내신다. 此岸(차안)의 다리에서 彼岸(피안)을 향해 끝없이 건녀시려고 하신 아홉 구비에서 보이는 고독한 실존의 老母.

 

아홉 구비의 고독/홍영수

 

시선은 초점을 잃고

넋 나간듯한 유령처럼

감정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리며

미라 같은 九旬이 미로에 서 있다.

무게와 부피와

육신의 껍데기마저 벗어던지고

기름기 없는 관절로

삐거덕삐거덕 한 발 두 발 옮긴다.

가야 할 길도, 방향도 잃었지만

한 줄기 고독이

사립문을 열고 나선다

실존의 九旬

숭고의 곱새걸음이다.

 

 

 

[홍영수 칼럼] 아홉 구비에서 보이는 실존의 고독 - 코스미안뉴스

말 그대로 명상의 방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엄숙함에 앞서 철사 가닥같이 삐쩍 마르고, 거센 입김으로도 금방 부러질 것 같은 키 큰 사람이 걷고 있었다. 아니 존재의 본질이 걷고 있었다.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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