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석 시조집 『별 하나 걸어놓고』
일상의 발견과 절제의 시조 미학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은 침묵의 고뇌와 고통 속에서 시어를 발견해 창조한다. 무엇보다 함축적이기에 증명과 설명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은 모두 거둬내고 오로지 뼈대만 남긴다. 그렇기에 시인은 작품에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은 드러내지 않고 언어의 고삐들을 허공 속에서 끌어와 내려놓는다. 이렇듯 새로운 발견을 위해 헐고, 낡삽고, 곰팡이 핀 언어, 불순하고 습한 공기의 언어와 결별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
임동석 시인은 첫 시집 『별 하나 걸어놓고』에서 평시조의 기본 틀인 3장 6구 12 음보에 충실한 정형 시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엇시조(평시조의 틀에서 어느 한 장의 1구가 2, 혹은 3음보 정도 길어진 형태) 시형인‘에덴을 꿈꾸며’ 외 3편 등을 통해 일상적인 생활과 삶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확장된 감각과 의식의 문을 통한 대상들에 대해 마음과 가슴을 열고 사유한다. 그리고 삶의 입각점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옳고 그름을 진단하고, 되새김하고, 성찰하며 평범함에서 위대함을 포착하는 견자(見者)가 된다.
우린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고독에 대한 인식이 함께한다. 니체는 <고독>이라는 시에서 “아직도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랴!”,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이제 고향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슬프랴!” 라 했다. 그렇다, 임동석 시인은 얼마나 행복한가, 고향이 있어서.
그의 시에서는 고향에 대한 추억과 노스탈지어에 젖은 심회를 읊조린 시편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고희의 길목에서 옛적 유년 시절의 삶과 추억들을 반추하는 이유이고 한편으로는 어쩜, 자기반성적 고백으로 읽히기도 한다.
새소리 묻어 두고 곁눈질한 반백 년
제봉산 기억 속에 끊긴 연줄 펄럭이고
흘러간 시간을 돌려 귀를 세운 고샅길.
허리띠를 두른 듯 영산강 돌아들고
서당재 올라서면 기차 소리 달려오던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 꿈을 짓던
내 고향.
-「내 고향 월송」 전문
어류인 연어도 모천으로의 회귀본능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귀소본능은 이미 몸과 마음에 배태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나이 들수록 간절함은 더하고 고향의 기억과 추억들의 미추(美醜)와 호불호를 떠나 그곳은 항상 유년의 동화 나라로 간직하고 있다. 화자는 첫수에서 보듯‘새소리’를 묻어 둔 반백 년의 세월 속에 지금도 ‘제봉산’에서 펄럭이는 ‘연’을 떠올리며 어릴 적 추억들을 반추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산강’과 ‘서당재’ , ‘기차 소리’ 등 지명을 나열하며 구체적인 주소까지 드러낸다. 이렇듯 사는 곳을 떠나있어도 마음의 지향점은 자신의 생에 있어서 가장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탯자리를 향하고 있다.
한 사발 보리앳국으로
속 그늘을
달랜다.
-「영산포」 부분
「영산포」의‘주낙’, ‘통통배’, ‘닻’, ‘포구’,‘통통배’, ‘등대’와 「영산포 2」의‘만선 깃발’, ‘갈매기’, ‘고깃배’ 등 전형적인 어촌의 어투를 사용하며 강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강변의 풍경을 한 폭의 점묘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것을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게 큼, 묘사하는 것 또한 시인이 갖춰야 할 요건 중 하나이다. 그러면서 셋째 수 종장은 “한 사발 보리앳국으로/속 그늘을/달랜다” 했다.
영산포는 홍어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 홍어 ‘애(간)’와 보리의 새싹을 넣어 끓인 애탕을 그곳에서는 즐겨 먹는다. 더불어 한잔 술로 속 그늘을 달래는데, 또 다른 시편에서 시인의 고향에 있는 영산강에 대해 비슷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노을 진 강둑에 앉아, “술 한 잔 홀짝이며 옛사람을 그리는데” (「영산강 2」) 하고 노래한다. 이렇게 고향이라는 말은 흔히 그리움이나 정겨움과 결부된 분위기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허기진 바람들은
도시로 쓸려가고
산 그림자 키를 세워 해를 지운 빈 마당
가을의 꼬리를 잡고
까르르 웃던
유년.
-「거기 2」 전문
“가을의 꼬리를 잡고/까르르 웃던/유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제인 ‘거기 2’는 유년 시절 정서적으로 매우 밀착된 곳이다. 도시로 떠나버린 빈 마당엔 산그림자가 해를 지우고 서 있다. 그곳에서 화자는 “가을의 꼬리를 잡고”에서 시골의 풍성한 계절인‘가을’의 이미지에서 꼬리를 잡고 놀며 ‘까르르’ 웃는 청각적 심상으로 유년을 떠올리며 독자로 하여금 동심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있다. 이러한 토속적 향수와 동심 세계의 시상에서 화자의 고향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읽을 수 있다.
번갯불
당기던 시절
다소곳이
지우고.
-「폐 굴뚝」 부분
또한, “번갯불/당기던 시절/다소곳이/지우고”에서 침묵하고 꼿꼿하게 서 있지만 이미 쓸모가 없어진 굴뚝에서 화자는 오래된 미래처럼 과거가 생생하게 손 내밀며 옷깃을 잡아당기는 듯한 회억에 잠겨있다. 이렇듯 시인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시상을 전개한다. 그것은 자기표현이기 때문에 정서와 분위기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사실 고향을 떠난 도시는 고향상실의 장소일 뿐이다. 그렇기에 고향을 상실했으니 잃어버릴 고향도 없다. 그러나 화자는 비록, 도심 속 폐허가 된 굴뚝을 바라보는 생활을 하지만, 어릴 적 유년 시절의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향을 잃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마당 가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바람을 궁굴리어 푸르게 짓는 그늘
가난한 가을이어도 향기만은 짙었지
매달린 아홉 식구 가지 휘청 휘어져
감겨오는 마디마다 꿈 하나로 다그쳐 온
익숙한 동구 밖 길에 흐린 눈길 돌아서고
빈 나무에 기대앉은 등이 굽은 그림자
접힌 자국 지워가며 길 끝을 다독이는
어머니 가녀린 손을 묵은 향이 잡아주네.
*2016년<시조문학사> 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모과나무」 전문
문학 작품에서 은유는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r)가 상호 배제되며 이루어지는 공간이면서 의미작용의 기초가 되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징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이나 문학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독자들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어떤 때는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이런 점에서 상징은 독자를 옭아매는 장치이기도 하다. ‘모과나무’는 어머니의 은유이면서 상징이다. 모과 열매가 맺힌 모과나무처럼 어머니 또한 가난한 대가족의 ‘아홉 식구’ 부양하느라 등이 굽었지만 향기만은 짙었다. 그 어떤 시련과 역경, 험난한 길도 ‘자식’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딛고 견디며 일어서야 하는 운명의 여신 아난케Ananke, 바로 어머니이다. 셋째 수 종장에서 자식들을 품에서 떠나보낸 어머니에게 열매를 떨군 모과나무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어머니 가녀린 손을” 묵은 향이 잡아주고 있다.
「영산강」의 첫수 초장의 “무안 장 갔다 오신 노을 걸친 아버지가”와 둘째 수 종장의 “한가득 털게를 잡아 까아맣게 웃던 엄니”에서 ‘노을’과 ‘까아맣게’의 시각적 대칭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의 심상을 그려내고 있다. 초장에서 시의(詩意)를 이끌어내고 중장에서 초장을 확장해 종장에서 결의를 나타내는 시조의 모범을 보여주는 시에서 시인의 고향 ‘영산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는 시중유화(詩中有畵) 속에서 화자는 고단했던 삶의 현장인 강가의 풍경을 효의 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외길 생에 묻은 먼지
다소곳이 털어내고
그럴듯한 몸짓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승이 저승이던가
저승이 이승인가
-「이승과 저승」 전문
어딘가,
고요의 거기
처음인가
끝인가
-「수목장」 부분
블루아워(The blue hour)라는 말이 있다. 해 뜰 녘과 해 질 녘의 어스름한 시간대를 말한 것이다. ‘불분명한 시간’이기 때문에 현실과 꿈, 빛과 어둠 이승과 저승이라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시간이다. 이처럼 시공간적인 카오스에서 “이승이 저승이던가//저승이 이승인가”(「이승과 저승」)와 「수목장」의 종장의 셋째와 넷째 소절을 행갈이 해서 “처음인가/끝인가”라며 ‘~가’의 의문형 종결어미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율을 효율적으로 창조해 정서적 환기를 하고 있다. 처음(삶), 끝(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관조하는 화자는 찰나와 영원은 일맥(一脈)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백의 시구를 읊조린 느낌이 든다. “천지는 만물이 잠시 쉬어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백 대를 지나가는 손님일 뿐이다(天地者 萬物之逆旅요, 光陰者 百代之過客)” 그렇다. 우린 잠시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저마다 다른 하늘 물고 가는 서리풀이
소리로 넘지 못한 누구의 간절함이
결기를 꽂아놓았나 바람 맵찬 언덕에
속 시름 늦게 풀린 햇살도 내려놓고
시간의 뒤켠에서 천년향이 되리라던
고려적 순한 노을이 식어가는 또 가을
한 길 속 봄을 긷는 귓불이 허물어져
맹렬한 길머리에 동통을 앓는 나무
제 안에 고였던 향이
촛불 앞에 놓였다.
-「서리풀이 향나무」 전문
시에서 일체의 적대적인 감정이 유입되지 않은 시가 감동의 차원에 쉽게 다다를 수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노와 갈등 구조, 현실 거부 등이 솔직히 표면화되지 않은데도 시가 주는 담백한 감동을 주는 때가 있다.
서초동의 대법원과 대검찰청 주변의 도로 한가운데는 900여 년 된 거목의 향나무가 서 있다. 그곳 주변의 특성상 당대의 치열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자는 초장에서 ‘한풀이’의 느낌을 주는‘서리풀이’에서 부조리하고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간절함’으로 환치하고 있다. 그러면서 ‘천년향’이 되리라던 꿈은 셋째 수 종장을 행갈이 한“제 안에 고였던 향이/촛불 앞에 놓였다”라며 불과 몇 년 전, 그곳에서 타오르던 촛불을 떠올리고 있다. 시대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아는 자만이 읊조릴 수 있는 시편이다. 시인의 예리한 더듬이에 와닿은 사회의 어두운 곳을 낱낱이 꺼내어 연시조로 일갈하고 있다. 화자의 역사에 대한 통찰이 돋보인다.
또한, 4 연시조「거기」에서는 우리나라의 국화인‘무궁화, 신라시대에는 근화향(槿花鄕)으로 불렀던 국화를 ‘눈에피꽃(눈에 핏발이 서는 꽃)’꽃으로 폄훼하고 또한 명산에 말뚝 박고 “길 막는 길 만들어 어미 품을 잃은 산”에서 보듯 기가 좋은 산의 맥을 끊어버린 일본제국주의의 못된 짓들을 고발하고 있다. 화자는 이 말을 새기고 있는 듯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낯이 선 홀소리에
울컥 솟아올랐나
날이 선 닿소리에
덜컥 내려앉았나
겨레의 하늘을 당겨
천 근 붓을
세운
다.
-「인수봉」 전문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넘어설 수 없다. 말인즉슨 자신의 언어와 싸우고 때론 언어를 지우고 지우면서 시와 비시 사이의 살핏점에 이른다. 이런 측면에서 화자의 치열한 시적 언어에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우리 고유의 시조는 외형적 형식과 연결성을 중시하는 정형시이다. ‘낯섦과 날섦’‘홀소리와 닿소리’, ‘울컥과 덜컥’, ‘솟아오름과 내려앉음’에서 보듯이 화자는 함축적이고 간결성을 띠면서 특히 압운과 율격 등의 내재적 리듬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종장의 “겨레의 하늘을 당겨//천 근 붓을//세운다”에 보인다. ‘인수봉’은 서울의 북한산 백운대에 높이 솟은 바위 봉우리이다. 그 봉우리를 ‘천 근 붓’으로 이미지화하는 화자의 시적 발상은 형식주의자들이 얘기한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낯설게 하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심한 관찰과 시적 상상력이 없으면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조에 대한 탐구 없이는 창작할 수 없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시조에서 시행을 바꾸는 것은 청각적 또는 시각적 이미지의 강조 그리고 운율의 창조를 위해서 하나, 지나친 행갈이는 시의 의미 전달이 흐트러지거나, 맥이 빠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191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자(文字)의 속성에서 형태를 중요시했던 운동의 대표적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It’s raining」처럼, 인수봉 봉우리를 붓의 형태로 이미지화해 ‘상형의 그림시’, 즉 새로운 형태주의(formalism)를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수봉’의 시에서는 화자의 정서와 운율적 요소가 음악이 되어 인수봉 바위 결에서 절창으로 흐르고 있다.
북적여도 한적해도
마음들일 한 간 없어
아슬한 가지 끝에 달빛 풀어 오고 간 길
참새들 날갯짓에도
흔들리어 두 손 짚네.
별자리 얽어매어 촘촘하게 걸어 둔 꿈
-「거미」 부분
“아슬한 가지 끝에 달빛 풀어 오고 간 길”과 “별자리 얽매어 촘촘하게 걸어 둔 꿈”에서처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관점은 새롭다. 가지 끝에 지은 거미집에 ‘달빛’이 오고 가고, ‘별자리’를 얽어맨다는 시적 발상은 매우 신선하다. 시인에게 천편일률적 시선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영원한 극과 극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몸은 일상에 있되 시선은 이미 일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화자는 평소에 봤던 ‘거미’에서 거미 너머의 거미를 보고 있다. 한마디로‘경생상외(境生象外)이다. 이처럼 『별 하나 걸어놓고』에서는 세심한 관심과 관찰에서 발견한 화자의 여러 시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임동석 시인은 만학의 문학도였다. 사실 배움에는 때가 없다. 살아가면서 공부는 시작과 끝이 아닌 영원한 진행형만 있을 뿐이다. 임동석 시인 세대에는 경제적 형편이 좋은 가정이 어디에서든 많지 않았다. 더욱이 시골이라면 빈부를 떠나 배움의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갈망했던 주경야독의 공부를 하면서 때론 외롭고 쓸쓸한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결과 시조에서 표층이 아닌 심층 무의식을 일깨우고, 또한 이러한 날들이 임동석 시인의 문학이 깊고 넓은 저수지가 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더디게 날아본다, 먹이밖에 모르던 새
몽당 발톱 부르쥐고 무딘 죽지 펄럭이면
왜바람 후리던 깃은 착지를 벗어나고
고요를 펼쳐 들면 미운 생각 들어있어
반쯤 찬 마음 하나 윗목에 괴어 놓고
곁 지기 그윽한 눈빛 갈피마다 끼웠다
별 하나 걸어놓고 손끝으로 읽어 온 길
흑백사진 빈자리에 모자 벗어 날리던 날
제 안을 날아오른 새 시샘달 물고 간다.
-「새샘달」 전문
‘시샘달’, 2월은 졸업 시즌이다. “모자를 벗어 날리던 날”, 보통 대학 졸업식 때 사각모를 하늘을 향해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졸업식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클리셰이다. 첫수 초장, “더디게 날아본다, 먹이밖에 모르던 새”에서 알 수 있듯이 뒤늦은 나이에 먹이밖에 몰랐던 화자는 2월의 ‘시샘달’을 ‘졸업장’으로 이미지화해서 행간의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시의 맛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처럼 시에서는 차이성과 유사성이 부딪쳐서 생성되는 은유는 탄력을 받는다.
둘째 수 종장 “곁 지기 그윽한 눈빛 갈피마다 끼웠다”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 후 배움의 길을 걸을 때 곁 지기의 눈짓 어린 고마움을 갈피에 끼우고 있다. 그리고 힘든 동토의 ‘언 땅’을 오르내리며 “말없이//신발 가지런히//해 준 당신”(「당신께」) 한다. 그 고마움을 화자는‘사랑해’라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삶의 갈피에는 곁 지기의 고마움이 끼워져 있을 것이다. 곱게, 아름답게. 사랑스럽게. 그리고 정 깊게.
또한, 「졸업장」에서 알 수 있듯이 배움의 힘든 여정 속 고통과 시련의 길, 그 길을 되새김하면서 그 어떤 비유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특히 셋째 수 종장 “만 리를 지고 온 바람 두 손으로 받았네”의 시구에서, 길고 험난했던 학문의 과정을 거치며 졸업장을 노을 속의 한 마리 새가 되어 두 손으로 공손히 받고 있다. 연시조는 단시조 한 편과 마찬가지로 각 수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고 장과 장, 구와 구의 연결성과 종장에서의 시적 감응이 있어야 하는데 ‘졸업장’에서 이 의미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에덴을 꿈꾸며
작은 동산을 가꾸려 했으나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다
미루나무잎 흩날리는
눈 짓무른 이 계절에
노아의 방주처럼
푸르게 남은
봄 여름 갈 겨울 속
나만의 추억을 싣고 싶다
별 하나 따서 저만치 걸어놓고
보시시 고운 눈 속에
빠져보고 싶다
너의.
-「에덴을 꿈꾸며」 부분
“에덴을 꿈꾸며/작은 동산을 가꾸려 했으나”, 보일 듯 말 듯 하단다. 화자가 가꾸고자 하는 ‘작은 동산’은 ‘소박한 삶, 꿈’의 은유이다. 엇시조의 시 형식을 통해 소박하고 정감 있는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상낙원이라기보다는 회화에서의 앵티미즘(intimisme)처럼 소박하고 서민적인 생활의 에덴동산을 꿈꾸고 있는 화자의 심성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노아 방주 때 땅에 호흡하는 모든 동물 한 쌍씩을 실었듯이 화자는 “봄 여름 갈 겨울 속” 사계절 속에 나만의 추억을 싣고 싶어 한다. 그것은 “별 하나 따서 저만치 걸어놓고/보시시 고운 눈 속에/빠져보고 싶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루카치는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시절은 행복하였노라.” 했듯이 지금도 임동석 시인은 하늘의 별을 따서 걸어 놓았기에 그 고운 눈 속에 푹 빠져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시인은 고향과 부모님을 떠올리는 시편들을 통해 그리움을 펼쳐 보인다. 일찍 고향을 떠난 뒤 그리운 부모 형제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때늦은 회한을 담아/하늘로 띄웁니다”(「부모님 전상서」) 라면서 지금은 저 먼 곳에 계신 부모님께 자신을 질책하며 회상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순우리말의 사랑과 관심으로 방송국에 출연했고 말부림새와 글두름손이 돋보인 임동석 시인의 첫 시조집 『별 하나 걸어놓고』을 살펴보았다. 한 편의 시가 인간에게 한 차원 높은 세계를 갈망케 하고 꿈을 싣고 가는 하나의 마차라고 할 때, 그 마차 바퀴에서 희망과 구원의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듣고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비되어 가는 영혼의 혈맥에 청심제가 되어 주었으면 하고, 타들어 가는 목마름에 맑고 맑은 옹달샘이 되어 건조한 목과 가슴을 적셔주면 좋겠다. 바로 임동석 시인이 그러한 감동의 길을 돌올하게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것으로 믿는다. 동문수학했던 지음(知音)의 필자로서 다시 한번 첫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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