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 천착穿鑿하지 말고‘강요’에 강요당하지 말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잊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렇기에 기쁨과 슬픔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유난히 마음이 아프고 쓰라리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환청처럼 남아서 영혼마저 흔드는 경우가 있다. 특히 예술가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혼을 받쳐 완성한 작품에 대해 소위 전문가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알 듯 모를 듯, 전문용어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동원해 비평했을 때이다. 그럴 때 작가는 섬뜩한 조각칼에 의해 조각된 느낌이 든다. 물론 모든 비평가, 평론가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 일부에 의해서 예술가의 길을 떠나기도 하고 문단에서는 절필하는 경우도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모음집 「깊이에의 강요」를 보면 평론가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작가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주인공인 젊은 여인의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가 하는 말 한마디,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라고 평을 했다. 결론은 이 평론으로 인해 그 작가는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등의 말을 되뇌다가 결국 TV 방송국 탑에 올라가 139m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문학가나 예술가들은 그 시대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의 비평에 휘둘리거나 의식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독자나 관람자들은 그들의 비평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고 알아내려고 하고 그 결과 그들의 평이 올바르고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연출되기 때문이다. 꼭 그러한가? 솔직히 아니, 다소 거친 표현으로 그들은 말로써 장난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유와 형태를 가지고 그러한들 그것은 그들의 몫일 뿐이다.
사실 전문가 집단의 그러한 비평은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선 신진 작가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질책이고 때론,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들어서자마자 바로 그만둔다는 의미이다. 비단 문학과 예술 분야뿐만 아니다. 강요하지 말자, 마찬가지로 초입자들도 이렇게 강요된 비평, 해석에 대해 둔감해지자, 비록 견디기 힘들지라도 말이다. 사실 작가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아집과 고집이 필요하다. 너무 전문가라는 집단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전문가 다운 비평이나 평론으로 인해 다소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들을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이해하고 느끼는 장점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와는 반대되는 측면에서는 그들의 해석에 독자나 관객의 주관적 시각과 관점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미술관에 가서 관람할 때 도슨트의 얘기를 들어서 몰랐던 것을 이해하는 측면도 있지만, 나만의 관점으로 감상하고 싶을 때는 오히려 소음처럼 느낄 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글을 쓰는 작가나 예술가들은 당연히 타인의 비판이나 평가, 분석의 대상이 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평가나 평론가의 입장에서 자신만의 전문성과 감정에 몰입되어 작품을 자기 멋대로 난도질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서 작품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에 오히려 가슴에 와닿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에게는 그 어떤 기득권에 군림하고 있는 권위와 명성에 저항하고 반기를 들 필요는 없을지라도 굳이 눈치 보고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비주류로 남을지언정 그들의 공격적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오직 자신의 작품성, 예술성으로 증명하고 승부 해야 한다. 비평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존중은커녕 깊은 오해의 잔해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명심하자
예술가들은 비평에 괘념치 말고 표준화된 문학의 프로그램을 벗어나야 한다. 자기만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가지고 사고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작품에 대해 가치를 판단하고 분석해서 비판다운 비판을 한다면 문학이나 그 어떤 예술 분야의 작품 등이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한다면 개인적 명성과 권위는 세워질지 몰라도 결코 긍정적 방향으로는 나갈 수 없다. 오죽했으면 어떤 시인은 천금을 준다 해도 평론을 받지 않게 다고 하지 않는가. 진정한 평론이나 비평은 새로운 분석과 가치로 평가할 때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의 맨 끝부분에 나온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cis)이다”
[홍영수 칼럼] ‘깊이’에 천착穿鑿하지 말고‘강요’에 강요당하지 말자 - 코스미안뉴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잊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렇기에 기쁨과 슬픔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유난히 마음이 아프고 쓰라리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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