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시

통로가 되고 싶은 외 4편

홍영수 시인(jisrak) 2024. 10. 25. 22:56

통로가 되고 싶은

 

 

남과 북 사이에 가로 놓인 나

반도를 가로지르며 한 가운데 서 있다.

훈민정음은 쭈뼛쭈뼛한 철조망의 등뼈를 오르내리고

심장 깊숙한 곳에는 같은 피가 흐르는데

가슴과 가슴 사이에는 내가 있어

오가야 할 언어의 날갯짓은 죽지를 접은 지 오래다.

그리움과 보고 싶음의 틈바구니에

멋쩍은 듯 녹슨 자세로 서 있는 나는 누구일까

서로의 오감이 끊겨버린 사이에 선 두꺼운 벽

그렇게 가로막은 호적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흔적마저 지우고 무너뜨려서 이어주고 싶어

장애물이 아닌 통로가 되고 싶은 거야

뜨거운 심장으로 더불어 살아야 할 너희들이

모질고 모진 세태의 틈새에 나를 세워놓은 거야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세상은 없는 걸까

장애물의 벽이 아닌 희망의 통로가 될 수 없는 걸까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오직 너희들뿐이야.

더불어 걷는 길이 되고 맞잡은 손이 되고 싶다면

함부로 내뱉은 언어와 칼날의 벽을 쌓지 말고

귀를 가리는 장막을 걷어야 해

그날을 빗을 때까지

난 망부석이 되어 서 있을 거야.

 

 

큰 여울, 그녀

 

긴 세월 그녀의 입술은 움직임이 없다.

역사의 굴곡과 분단의 얼개로 흐르면서

갈라져 찢긴 상처와 슬픈 앙금을 물살에 안고

큰 여울, 그녀의 말 없는 비밀이 흐르고 있다.

 

하 많은 세월 한도 탄식도 하지 않고

귀도 버리고, 입도 버리고, 자신마저 버리면서

위 아랫녘의 어우러진 굽고 휜 물굽이를

돌고 돌아 흐르면서 표정마저 지워버렸다.

그녀의 낯빛은 아직도 어둠이다.

 

를 만나면 잠시 머물고 여울목에선 서두르고

경계를 지운 위아래 물끼리 맨살 버무리며

입 닫은 물살로 한 몸이 되어

더 깊숙한 곳으로 통정하듯 살을 섞고 있다.

 

물 맑은 얼굴로, 때론 분탕 칠의 붉덩물로

강둑을 벌창하고 길을 물마지게 하면서

낮은 자세로 제 몸 옮겨가는

말 없는 큰 여울, 그녀가

강물의 언어로 평화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

 

 

신답리 고분

 

 

일천오백의 세월이 묻혀 있다

무관심을 머리에 이고 땅속 깊이 드러누운

말 무덤이라 불리며 외면받는 그곳에

고구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지는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논밭을 일구는 쟁기질에

탈골된 그들의 사지와 이목구비가 갈아엎어지고

긴 시간의 아랫도리를 한탄강에 씻기면서

망각의 기억 속에 검은 돌을 베고 누워 있다.

무너지고, 깨트려 지고 흩어질 때마다

지하에서 깨어난 석물들은 한탄하지 않으면서

두 개의 고분을 둥근 세월의 포대기로 감싸고 있다.

강물은 긴 역사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고

고분은 지금껏 옛 강변의 갈대를 추억하지만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잊고 잊히며 살아온 지 오랜 세월

지금은 까맣게 잠든 석실이 깨어나고

담장과 축대에서 뛰쳐나온 고분의 석재들이

지난날과 오늘의 틈바구니에 서 있다.

그 사이에 층층의 역사는 또 하나의 층을 더하고

큰 여울도 흘림체의 서사를 쓰면서 흐르고 있다.

 

 

재인폭포

 

 

맑고 흰 수직의 함성으로 낙하하는

물기둥의 내리꽂음을 견디는 가마소,

온전한 자세로 받아 감싸 안는 것은

넉넉한 포용의 또 다른 이름인가.

 

억겁 세월의 시끄러운 물줄기의 소음을

천상의 소리로 듣고 있는 주상절리,

올곧게 낮춘 자의 도저한 품격은

오롯이 귀만 기울이고 말없이 서 있는 것인가.

 

검은 절망 같은 현무암의 틈새 사이로

작은 물 알갱이들이 휘날리며 피우는 방울꽃,

밝은 희망이란, 방울꽃이

직벽의 허리춤에 오색 무지개를 피워내는 것인가.

 

솟구치는 용암의 뜨거운 숨 덩이를

소롯이 껴안은 지장봉 산날망의 티 없는 순수,

그렇게 시비도 없는 열린 마음의 재인才人

텅 비운 자의 꽉 찬 안음인가.

 

 

반도의 반달

 

 

온달이 떴네, 남녘의 하늘에

반도를 비추는 둥그런 달빛

태극의 위아래가 한 몸으로 빛나네.

 

창공에 드리운 갑작스러운 먹구름

멀리 밖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황당하게 잘린 반 토막

그 위를 비추는 건 반달이네

 

불어 내려오고

불어 올라오는

이념의 냉풍과 온풍은

오르내리지 못하고

배꼽에 멈춰선 바람은

자유롭지만

바람일 뿐이네

 

두 개의 물방울이 만나면

하나의 물방울이 되듯

반달과 반달이 만나면 온달이 되겠네

 

삼십팔 인치 허리를 동여맨

철 띠를 풀고

온달 아래 멍석 깔아

한 울림 판 놀이를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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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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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회 한탄강문학상 수상자 발표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기념하고 국민들의 문학 창작 의욕을 지원하기 위해 종자와시인박물관이 주최하고 연천군이 후원하는 제4회 한탄강문학상 공모 작품 심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순위 구분 접수
번호
성명 당선작 장르
1 대상 193 홍영수 통로가 되고 싶은4
2 금상 213 최재영 포탄밥4
3 은상 235 박성민 목울대를 노래하다4 시조
4 은상 226 이은영 끝나지 않은 귀환4

 

4회 한탄강문학상 심사평

 

제시한 소재와 주제 구현에 충실한 작품 중시

 

한탄강문학상은 2021년부터 매년 공모하여 올해 4번째 문학상을 시상하게 되었다. 1회 때는 작품 공모에서 특별한 제약 없이 시나 시조 10편을 제출하도록 공모, 456명이 응모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수상작은 작품의 수준을 중시하여 선정했다. 그리하여 작품의 수준은 높았으나 한탄강문학상의 고유성이나 특별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2회 때부터는 한탄강문학상의 제정 동기나 문학상 제정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소재와 주제를 작품의 공모에 조건을 부여하였다. 작품 내용의 제한 규정때문인지 1회 때보다 응모자가 많이 줄었다. 그리하여 3회 때는 2회 때의 소재와 주제의 범위를 확대하여 용서, 사랑, 평화를 추가하여, 창작의 범위를 확대하고 3~5편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번 4회 공모에서는 소재와 주제를 3회 때와 비슷하게 제시했으나 화해의 주제를 하나 추가하고 작품 편수는 5편을 제출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응모자가 3회 때보다 80명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번 제4회 공모에는 내용 조건으로 제시한 소재와 주제의 작품이 많아 반가웠다.

 

이번에 응모한 작가는 240명에 달하며 작품 수는 무려 1,200여 편이다. 응모한 작가들은 제시한 내용을 쓰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탄강문학상에서 제시한 내용, 한탄강과 연천의 비경이나 애환, 한반도 분단과 통일, 용서와 화해, 사랑, 평화등의 소재와 주제를 작품에 구현한 작품을 중시하여 수상자를 선정하게 되었다. 최종심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을 놓고 장시간 치열한 논의 끝에 최종 당선 작가의 순위를 결정했다.

 

이번 4회 한탄강문학상의 응모작품은 종자와시인박물관 운영위원 7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번 수상자 선정에서 중시한 것은 제시한 소재의 고유성이나 특성을 작품에 반영하였는가, 제시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구현하고 있는가에 관점을 두었다.

 

대상에 선정된 홍영수의 시 통로가 되고 싶은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현실, 나날이 높아지는 총칼과 언어의 장벽, 그 모든 것을 걷어내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야 언젠가는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날을 빗는다는 생소한 표현이지만, 참신함이 돋보이고 참여와 순수의 영역을 동시에 구현하였다. 홍영수의 시 작품은 소재와 주제 의식이 분명하고 5편 모두 주제 구현에 충실한 표현력을 높이 평가했다. 앞으로 이 작가의 날카로운 혜안과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작품들이 창작되기를 기대한다.

 

큰 여울, 그녀낮은 자세로 제 몸 옮겨가는 / 말 없는 큰 여울, 그녀가 / 강물의 언어로 평화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를 통해서 한탄강이 겪어온 인고(忍苦)의 세월과 평화를 염원하는 두 얼굴을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신답리 고분역시 고구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지는 불과 얼마 전의 일이라는글귀에서 현대인들의 역사의식에 대한 부재와 무관심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문학적 가치를 부여한 것은 긴 시간의 아랫도리를 한탄강에 씻기면서 망각의 기억 속에 검은 돌을 베고 누워 있다.”라는 뛰어난 시적 표현에 점수를 주었다.

 

재인폭포는 올곧게 낮춘 자의 도저한 품격과 순수와 열린 마음으로 재인을 표현하고 있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반도의 반달두 개의 물방울이 만나면 / 하나의 물방울이 되듯 / 반달과 반달이 만나면 온달이 되겠네.”에서는 시인의 역사에 대한 정체성이 두드러져 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시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의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금상으로는 최재영의 시 포탄밥4편을 선정했다. 그의 포탄밥은 과거 연천 지역인들의 사실적인 애환의 소재이며 주제다. 역사적 사실을 시로 녹여낸 수작이다. 연천 고문리의 포탄 사격장에서 탄피를 주워 먹고 살던 과거 시대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환기시켰다. 노인의 독서배경은 철원의 월정리이고 학저수지역시 철원에 소재하고 있지만 제시한 소재와 주제에 관련성이 있고 분단의 애환을 담고 있어 금상 작가로 선정했다.

 

은상 수상 작품으로는 박성민의 시조, 목울대를 노래하다를 선정했다. 시조의 내용이 짧지만 담백하고 응축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박 시인의 시조 작품은 5편이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한탄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떨칠 수 없는 애환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천 지역의 아픈 과거와 현실을 체험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시조의 고유한 틀을 지켜 한탄강 문학상의 취지에 부합하여 은상으로 선정하였다.

 

은상 수상자인 이은영의 끝나지 않은 귀환은 과거 전쟁과 현재의 아픔을 같은 시점으로 연결하려 한 작품이다. 전몰 장병의 유해 발굴, 피가 흐르지 않는 발가락뼈, 폭격에 찍힌 군인, 백골을 먹으며 자란 나무 등의 소재로 전쟁의 아픔을 생생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였다. 다른 4작품에서도 주제를 구체적,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인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번 수상작 외에 시적 완성도가 높은 좋은 작품도 있었으나 소재의 고유성이나 특성이 사실과 거리가 있어 수상작으로 올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리하여 제4회 한탄강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작가와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대상() : 홍영수의 통로가 되고 싶은4

금상() : 최재영의 포탄밥4

은상(시조) : 박성민의 목울대를 노래하다4

은상() : 이은영의 끝나지 않은 귀환4

 

이번에 제4회 한탄강문학상에 응모한 작가님께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 응모하여 수상의 영예를 누리시길 기대한다.

 

- 한탄강문학상 심사위원 일동

(채찬석, 김석표, 이병찬, 전현하, 김태용, 이순옥, 박하경)

 

2024930

사단법인 종자와시인박물관 관장 신광순

한탄강문학상운영위원회 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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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 소감

 

저 작은 물 알갱이의 방울꽃과 무지개를 보라’. 작년 여름, 재인폭포를 갔다. 폭우가 내린 뒤의 방울꽃과 직벽 현무암의 허리춤에서 반달로 핀, 생경한 듯 익숙한 무지개의 오색 빛 향연에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환희의 꽃이고 싱그러운 생명이며 텅 빈 가슴에 고동치는 한울림의 맥놀이였다.

 

출근길 아침, 받지 못한 전화 때문에 휴대폰 문자로 수상 소식을 접했다. 순간, 환희의방울꽃과 빛의 향연인무지개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연천지역의 이곳저곳을 답사하면서 묘계질서(妙契疾書)를 충실히 해 놓았던 비망록, 그 안에서 요가 중이고 명상 중인 자음과 모음의 뒷덜미를 펜의 죽비로 내리쳐서 깨웠었다. 그때 화들짝 놀란 기역니은아야어여의 영감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

 

먼저, 한없이 부족한 졸시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소새동인을 이끌어 주신 박수호 선생님과 이문회우님, 밤늦은 시간의 자판 소리에도 말없이 응원해 준 옆지기와 두 딸에게도 감사함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구석지고 결핍된 시법과 시품을 가슴에 안고 심사위원님들의 응원을 소롯이 껴안아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시작(詩作)을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