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호 시인 집중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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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비움과 버림의 성찰 속 자아 발견
비움과 버림의 성찰 속 자아 발견 홍영수 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은 시각과 사고와 가치체계가 인습적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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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각과 사고와 가치체계가 인습적이어서는 안 된다. 고착된 시선과 편협한 시야의 각도를 집어던져야 한다. 또한 시인은 고정관념과 타성에 젖은 익숙한 질문이 아닌 보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 삶의 경계에 서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과거를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뻔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비정형이고, 형태가 없는 미완성이고 소재로부터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 속 사유와 정감의 감흥이 어울려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올 때 좋은 시로 평가받는다.
이금호 시인의 시편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감각을 통한 내면의 탐구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특별한 수사법, 상징과 비유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생성과 변화에 바탕을 둔 자기만의 작품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경험을 통한 비움과 내려놓음의 깊은 인식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메마른 화학비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랜 시간 촉촉하게 숙성된 두엄이라는 언어의 도구를 사용해 시와 독자와 교감하면서 그 자체가 또 다른 낯설게 하기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일은
내가 만든 것
내 말
내 집착이
사랑을 떠나가게 하고
꽃을 피우고 지는 일까지도
내 마음속 변덕인 것을
낙엽은 지고
마음 없이 살고 싶은 마음
시름없이 앉아 있을 때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제 몸을 흔들고 있는 것
어스름 고요 속으로
슬며시 기대보는 내 마음
-「내 마음 」 전문
해체주의(Deconstruction)가 문학에 영향을 미친 것은 텍스트의 다의성과 다양성이다. 그래서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다의적이다. 작가의 의도를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자신의 경험과 맥락에 따라 해석한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측면에서 바라본 「내 마음」의 시를 보면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시상 전개를 볼 수 있다. 1연의 “내가 만든 것’은 고통의 진리인 고제(苦諦), 2연의 “내 집착이/사랑을 떠나게 하고’는 고통의 원인인 진리 집제(集諦)이고, “낙엽은 지고/마음 없이 살고 싶은 마음” 고통의 소멸인 진리인 멸제(滅諦)이다. 그리고 몸을 흔들거리는 “풀 한 포기”에서 “어스름 고요 속으로/슬며시 기대보는 내 마음”은 고통의 소멸로 접어드는 진리 도제(道諦)이다. 그렇다면, 팔정도의 길을 걸어가야 할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근원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인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가을도 끝자락
보도블럭 위에
은행잎이 이불을 덮어주고 있다
겨울 채비를 하는지
가만히 흩뿌려 놓고 가는 낙엽들
다 내주고 덜어낸
몸부림친 흔적
나무들이 숯 검댕이 얼굴로 서 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저물어 가는 산자락을 본다
-「입동」 전문
가을의 끝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입동, 1연의 “가을도 끝자락/ 보도블럭 위에/은행잎이 이불을 덮어주고 있다” 이렇게 흩뿌려진 낙엽들은 계절의 변화와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상징하고 있다. 마지막 연 “나는 우두커니 서서/저물어 가는 산자락을 본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 또한, 해 질 녘 삶의 끝자락에서 저무는 한 해를 보고 있다. 그리고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보람, 또는 저물어 가는 희망과 슬픔, 흐느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3연의 ‘다 내주고’, ‘몸부림’, ‘숯 검댕이 얼굴’ 등의 시어에서 알 수 있다.
한편으로 낙엽은 결코, 죽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삶의 준비를 한다. 인간의 죽음도 결코 헤어짐이나 방황이 아닌 휴식과 해방, 부활 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마지막 행에서 보듯이 우두커니 서서 “저물어 가는 산자락을 본다” 한다. 화자는 ‘낙엽’을 ‘인생’으로 치환해서 결국 인생도 낙엽처럼 변화와 덧없는 분망(奔忙)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낙엽’의 이미지에서 사랑에 의해 사랑 속에서 죽어가는 것, 어쩜 화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실현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대를 기다리는데
몸속 어딘가 달그락 부딪는 소리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거리
오고 있는지
올 수 없는지
마주친 뭉게구름은 자리를 바꿔가며
나를 따라오네
생각을 내려놓고
바람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무심코 들려오는 안내 방송
햇살과 구름만 데리고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속 언어는 무한 연착입니다
-「연착」 전문
‘그대’라는 단어에서 ‘그대’의 의미는 특정되었다기보다는 다양성을 지닌다. 어떤 대상,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몸속 어딘가 달그락 부딪는 소리/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거리”의 청각적이고 육감적인 기다림을 알고 모르고 와 관계없이 일종의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주는 ‘엠비귀티(Ambiguity)’의 친화력을 오히려 느끼게 해준다. 바로 이러한 모호성의 베일 속에 낯설게 하기의 시적 효용성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대한 구속과 얽매임에 의존해 살고 있는데도 정작 모르고 살아간다. 손에 꽉 쥐고 싶은 마음 때문에 손을 빼지 못하고 결국엔 삶에 대한 집착과 욕망과 갈망, 소유욕 등에 얽매일 때, 바로 이때 “무심코 들려오는 안내 방송”은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라는 방하착(放下著)의 메시지일 것이다. 바로 “생각을 내려놓고/바람의 말을 듣고 있을 때”의 시구가 그렇다.
화자의 이러한 시심은 “내 마음/낙엽은 지고/마음 없이 살고 싶은 마음/시름없이 앉아 있을 때”(「내 마음」 )와 “생각을 접어놓고 물구나무서면/뇌 주름 속에 걸려 있는 부스러진 말들”(「글자는 요가 중입니다」)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연 첫 행 “햇살과 구름만 데리고” 대기하라고 한다. ‘햇살’과 ‘구름’은 ‘밝음’과 ‘어둠’ 또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대조적 비유법을 통해 “내 마음속 언어는 무한 연착입니다”에서 보듯이 늦은 도착마저도 기한이 없다고 했다. 칼 융이 얘기한 “대극의 통합”을 염두에 둔 ‘햇살’과 ‘구름’의 양극을 통합하는 합일적 사유의 깨달음에서 화자의 폭넓은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날개의 비밀」에서 “가벼운 저 날갯짓은/내 생의 몸짓을 닮아 가고” 있는 “저 날갯짓”은 인간의 덧없는 욕망의 비유이고 “부질없다는”, “유의미하다는” 것은 ‘욕망’의 은유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의 “거듭거듭 허공을 떠돌다가/추락하는 날개의 비밀”에서 날개가 녹아내릴 추락을 감수하고 날아오르는 ‘이카루스 날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시를 아퀴짓고 있다.
그것은 허무일까
고단한 하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뼈마디 숭숭 뚫고 지나가는 바람일까
나는 간절한 심중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반사경 거울에 덮인 먼지를
그것만 피해주기를 기다리면서
-「거울을 보는 노인」 부분
3연의 의문형 ‘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사경에 투영된 모스부호 같은 ‘까’는 분명 삶의 황혼 녘에서‘반사경’을 통해 뒤안길을 반추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것은 살아오는 동안의 사랑과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선택받지 못한 삶은 외롭고 슬프다. 최근에는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 외로움과 고독감 등에 시달리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ageism(노인차별주의)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나는 간절한 심중으로/노인을 바라보았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사회적 화두인 ‘노인’ 문제에 무조건 반사적인 말미잘의 촉수가 닿아있다.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에 아직도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인간 본성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 시인이 선물한 순수와 고귀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고해상도의 행복을 안을 수밖에 없다.
또한, “반사경 거울에 덮인 먼지를/그것만 피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에서는 그리스도의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했고, 송강 정철도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란 다하여라”의 말들을 되새김했을 화자의 삶에 대한 성찰에서 깊은 효심을 읽을 수 있다.
말하지 마세요
흔들리고 있다고
떠나간다고
뒤돌아보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물 속 깊은 곳에
낮은 눈빛으로
떠오를 때까지
더 오래
흘러가거나
머무르거나
-「강물」 전문
1, 3연의 ‘마세요’, 2연의 ‘고’와 5연의 ‘나’의 각운 등에서는 호흡의 단절과 동시에 음조를 고르는 시법으로 강구한 어휘들임을 알 수 있다. 이금호 시편들의 음악성은 이같이 의도한 시어 활용의 소산이다. 이러한 수법에는 리듬감뿐만 아니라 호흡의 간결미를 두드러지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더한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른다. 그 강기슭에서 어떤 의미를 낚아야 하기에 서툴고 재빠른 손기술로 숱한 것을 낚으려 한다. 기쁨과 행복이 걸리는가 하면, 슬픔과 불행도 따라 올라온다. 결코 시간이라는 강은 허무할 뿐이다. 그 허무 속에서 무엇을 낚은 것일까? 세월이 흐르는 강물에서 낚았던 부귀와 행복, 고통과 고난 등은 얼마나 속절없는 것인가? 화자는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것은 “흔들리고 있다고/떠나간다고/뒤돌아보고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다. 오직 분주한 발걸음과 변화만 있을 뿐이다’라고.
좋은 시는 자연스럽게 읊조릴 수 있는 노래가 된다. 이금호 시인의 서정적인 시의 날개에는 노랫가락이 달려 있다. “짐작으로 줄을 맞추고/짐작으로 눈을 맞추고”(「두 사람 3연」), “오고 있는지/올 수 없는지”(「연착 」), “부질없다는 뜻인 듯/유의미하다는 뜻인 듯”(「날개의 비밀 2연」), “그것은 허무일까/고단한 하루일까”(「거울을 보는 노인 3연 부분」) 등에서 보듯이 동음어의 반복과 서술형, 의문형의 종결어미 등에서 시어들이 호흡의 단절과 함께 시낭송의 음조를 고르고 있다. 이것은 화자의 의도된 어휘들의 활용이다. 리듬감과 시형의 간결미를 돋보이게 하는 효율성을 보듯이 이금호 시인의 온유한 심성에서 우러나온 언어정제에 혼을 싣는다면, 고품격의 시품(詩品)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시 세계로 잠시 들어가 보는 것, 그것은 창조적이고 함축적인 사유를 통해 시의 숨소리를 들어 보는 것이다. 시어의 발걸음을 보고, 시문 속 그림을 감상하고, 시인의 시상을 상상하며 내 안에 잠든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와 상관없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싱싱한 세계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감각의 박동과 심장의 고동은 뛸 것이다. 이럴 때 시인과 독자와의 감정이입으로 새로운 의미를 되새김하게 된다.
비움과 내려놓음, 겸허함의 시 창작 길을 걸어온 이금호 시인, 이번의 시편들은 앞으로 구현하고 힘을 쏟아야 할 자신의 문학관을 조심스럽게 선보이는 작지만 커다란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풍요로운 물질 속에 평탄치 않은 사유의 결핍과 정신적 허기, 궁핍을 감싸 안고 화해와 감동의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영혼의 성장을 위한 정신적 비타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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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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