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방지기/홍영수
기쁜 날들은, 저무는 노을빛에 물들어 간다.
지는 꽃잎의 곡조는 힘없이 나풀나풀 떨어지고
둥근 빗방울 소리는 납작 엎드려 들려온다.
난, 엷어지는 짙음으로 무르익어 갈 것이다.
생의 깊은 뜻을 온몸에 껴안는 늙마의 그늘 아래.
곱새걸음으로 바라보는 수평선 끝자락에는
노을빛 철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난, 접어두었던 지혜의 죽지를 활짝 펼 것이다.
까치놀의 허리가 처마 끝 풍경에 매달려서
흔들리는 외로움 한 자락으로 반짝거릴 때
희망의 햇귀도, 기도의 달빛도 희미해져 가지만
난, 영원한 삶의 언덕이 될 것이다.
얼마나 어두운 날들의 끝자락을 붙잡고 헤매었던가.
질척거리며 걷는 시간의 발자취들이 결빙되어 가고
설익은 정열의 씨앗들은 발아하지 못했지만
난, 잘 여문 씨앗의 씨눈으로 뒷방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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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온 누리가 하얗다. 하늘과 땅이 자신을 지우고 나에게 다가선다. 나는 멀고 아득한 우주 존재의 이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이 적막함의 정점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 그래서 백지에 시의 흔적을 남겨야 할 것 같다. 나의 시어는 눈송이 하나, 고드름 하나 그리지 못하고 자꾸 차가운 고요의 속살을 파고든다.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시어들을 다문다문 주워 모아 입 안에 가득 넣어 지근지근 씹어본다. 시어들이 터지면서 소리를 지른다. “바보야! 넌, 아닌 것 같아”
2025년 01월 28일. 을사년 까치 설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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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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