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문학』 신인상 당선작(시) - 유부식
밀당
당겨야 할 때 밀면 괜찮고
밀어야 할 때 당기면 당황한다.
이 미닫이의 혼돈 앞에
표식 된 안내에 따라
드나든 사람들 얼마나 될까.
규칙일까, 규범일까, 약속일까.
아님, 순리일까.
헷갈리는 순간에 흔들리는 내 마음의 촉수
혼란스러운 밀당의 비밀
그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회전문일까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일까, 또는 칩 카드의 터치일까.
더 나아가
얼굴과 지문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문명일까.
진화되어 가는 시대의 흐름 속 비밀의 언어를
내 어찌, 해독할 수 있을까
문밖을 나와 도시의 거리를 바라본다.
밀고, 당기고 섞이어 그 어떤 열쇠로도 풀 수 없는
컴컴한 영혼들의 융융한 낯빛들이
얽히고, 설킨 표정으로 분주히 오간다.
너와 나 사이
너나들이는 없는 걸까?
그 어떤 문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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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니
마당 한 켠, 외양간 아궁이에
생솔가지 구부려 가득 쑤셔 넣으신
검불과 물거리로 조심스레 밑불 살려
호호 부는 입김으로 불을 지피신
활활 타오르는 불기운 같은 울 엄니,
당신은
제 생의 근원이고 삶의 불꽃입니다.
토~독 톡톡, 토도독
타오르는 불꽃이 불똥 튀며 사그라져 갈 무렵
장작개비 몇 개 얹혀 두세 번 부채질하시면서
소죽솥의 여물을 잉걸불에 퍼~얼 펄 끓이실 때
꺼질 줄 모른 불씨 같은 따스한 울 엄니,
당신은
제 마음의 구들장이요 아랫목입니다.
소죽가마에
깻대, 콩대, 쌀겨 등을 부어 넣고
구정물 걸러 밥알 하나하나까지
며칠 먹이의 쇠죽을 소죽푸게로 뒤적거리며
구시통에 몇 바가지의 정성으로 퍼 담은 울 엄니,
당신은
저에게는 한겨울의 불쏘시개요 온돌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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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사랑
새벽 공기가 유난히 새롭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율에 귀를 쫑긋 세운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행진하듯 걷는 아침.
걸음걸음마다 찍히는 그녀의 잔상들이
내 마음의 맑은 속살을 하얗게 적신다.
아침 이슬보다 상큼하고 영롱한
햇귀보다 눈부신 그녀의 얼굴을 그리면서
저녁 약속 시간까지
내 영혼은 그녀에게 망명 가 있을 거야.
다른 사랑은 굳이 필요 없기에.
심연에서 사랑이 피어오를 때는
욕망이라는 덫의 처음과 끝을 버릴 거야.
둘이 아닌 하나가 되기 위해
내겐 그리움이란 없어, 순간순간
불태워 버리기 때문이야.
하나가 되기 위한 약속된 사랑이
둘의 영혼에 생기를 공급해 줄 때
그녀와 나 사이
결코, 이별이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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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놀음과 노름
되는 법도 없고, 아니 되는 법도 없다
일천 번 남짓, 여섯 숫자의 도장 찍기는
고급 수학으로 숫자를 미분하는 놀음이고
희망과 절망, 허무와 실존 사이에서
높은 해상도로 그리는 노름이다.
그 숫자의 판놀음을 떠나고 싶지만
주위를 맴돌지언정
중독의 중독성 때문에 그 짓을 멈출 수 없다.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부자가 되고
이월된 달에 당첨이 되면 갑부가 된다.
놓을 수 없는 욕망의 횟수가 벌써 천백사십 번
똑같은 번지를 적어 들고 그 길을 헤매었지만
그 어떤 부자와 갑부를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다.
매번 돌아선 순간,
드러나는 것은 나도 모른 치부였다.
아직도
아집과 고집,
몽상과 망상 속
숫자의 놀음과 노름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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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몽紅枾夢/ 유부식
꿈속에서
홍시를 따먹은 날
선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콜록콜록한다.
새빨갛게 익은 감을 먹는 날이면 더욱 심하다.
그런데, 연시나 반시를 먹으면
가벼운 콧물이나 재채기로 멈춘다.
알 수 없는
십중팔구의 믿음과 불신 사이의 몽(夢)
그렇다면,
꿈이 아닌 맨정신에 홍시를 먹으면
감기의 예방접종을 맞는 것일까?
혼돈의 꿈과 현실 사이
미더운 모순의 상상력 앞에
갸우뚱하는 내 모습.
아직도 미몽(迷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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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시를 쓴다는 게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쓰면 쓸수록 시와 멀어지는 고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 문학회에서 많은 시간 시와 낭송 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시의 언저리에서 맴돌 뿐, 제멋대로 뒹구는 시가 되어 부끄러웠습니다. 며칠 전,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순간 부끄러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25년 동안 명실상부한 문학의 정도를 걸어온 계간 『제3의 문학』지에서 신인상 수상을 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의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심히 써야 한다는 통증의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또한, 열심히 써야 한다는 질책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먼저 졸작인 저의 시를 보듬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시문학의 동반자였던 부천 문인들과 문학의 숲에서 동고동락했던 동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지켜봐 준 저의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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