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이가은
깊은 밤 규원가에 문풍지 우는 소리
일찍이 능한 시문詩文 치마 두른 원죄 앞에
부용꽃 서늘한 이마
돌아서서 지우고
난蘭 곁에 다소곳한 버들가지 하얀 송이
가을날 우뚝 솟은 연꽃 같은 노래마저
진흙 벌 캄캄한 속을
뿌리내리지 못하고
골안개 자오록이 온몸으로 젖는 날은
뼈끝으로 새긴 곡자* 삼구홍타* 예감하고
불살라 거두었던 시혼
먼 땅에서 빛나고…
*곡자(哭子) : ‘두 자녀의 죽음에 울며’라는 시
*삼구홍타(三九紅墮) : 난설헌이 지은 「夢遊鑛桑山詩」에서 스물일곱 송이 꽃이 붉게 떨어지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본인이 죽을 것을 암시한 시.
_이가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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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시가인 시조, 특히 현대 시조는 고유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서 그 안에 현대적 주제와 방법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정형시라는 틀을 벗어나 형식의 확장을 부분적으로 추구하는 작품들도 많이 등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정형시의 미학은 언어의 절제와 긴장을 통해 현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학교 때 배웠던 수많은 시편 중에,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등,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율독(律讀)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 등을 경험하면서 기억의 촉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至精無文이라고 했던가. 지극히 가까운 정분이나 지극히 절박한 감정에서는 글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더욱이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 앞에서 차마 어찌 글을 짓겠는가. 그래서일까 시인은 동병상련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西河之痛의 아픔을 토해낸다. 그가 바로 허난설헌이다.
첫 수에서는 규방가사의 ‘규원가閨怨歌’를 통해 미녀의 또 다른 이름인 부용꽃과 그의 타고난 시적 재능 그리고 난설헌의‘ 三恨‘(왜 조선 땅에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에 표출된 남존여비의 인습과 규범에 묶여 컴컴한 봉건주의의 시대적 배경에서 재능을 뿌리내릴 수 없는 여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수에서 시인은 許蘭雪軒 호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그녀의 호‘蘭雪軒’은 여성의 미덕을 칭송하는‘난혜지질蘭蕙之質’에서‘蘭’을 가져왔고 ‘雪’은‘雪’ 버들가지 하얀 송이(서설絮雪)를 눈에 비유하는데, 이는 지혜롭고 고결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여성 즉, 허난설헌을 의미하며 시인 자신과의 동일성을 강조한 측면도 있다.
마지막 수에서‘삼구홍타’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늘어져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차가운 달빛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위의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三九’는 허난설헌 자신이‘3×9=27’로써 죽음을 미리 예상하는 것이고,‘紅墮’는‘붉게 떨어지다’는 의미로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상징하는 시어로써, 27세에 죽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시참(詩讖)과 함께
應知弟兄魂(응지제형귀) 너희 오누이 넋이야 응당 알지니,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서로 어울려 놀겠지.
두 자녀를 잃고 쓴 위의 시‘哭子’라는 난설헌의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斷腸之哀를 읊조리고 있다. 그리고 부모는 잃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 게 아니라 뼈에 새긴다고 한다.
마지막 행의‘먼 땅에서 빛나고…’는 조선에서 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알려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말줄임표로 아퀴 지으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3 수로된 연시조, 각 수의 종장을 행갈이로 갈무리 한 것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짐작컨대 시인은 어느 날 ‘哭子’라는 한시를 읽다 차마 다 읽지 못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을 것이다. 애써 목석연하듯 하지만 잠시 후엔 뼈에 새겨 놓은 자식을 떠 올리며 목소리의 통곡을 접고 성엣장의 시린 가슴을 삼키며 붓으로 토해냈을 것이다. 시조 가락에 역사적 인물을 끌어와 내실을 다진 시인의 아름다운 시조 미학에 시선이 머문다.
정지용의 시‘유리창’이 떠오른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그녀의 글,‘閒見古人書(한가 할 때는 옛 사람을 글을 보라)’를 가슴에 탁본하며
허난설헌(1563년-1589)과 같은 해 태어난 존 다울랜드(John Dowland,1563-1626)의
‘라크리메Lachrimae(류트와 비올을 위한 일곱 개의 눈물)’를 들으며 펜을 접는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허난설헌/이가은
허난설헌/이가은 / 부천시, 경기도 와 국회의 뉴스 그리고 삶을 전하는 지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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