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내성천문예현상 2

고평역(驛) 가는 길 / 황주현

도망쳐 온 곳 치고는 적당히 안전했다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강을 따라 내려가던 철길이 물이 불어 잠깐 멈칫하는 곳 슬레이트 지붕이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을 흉내 내어 코스모스들이 철로 변에서 연애하는 곳 빗물 고인 길바닥을 돌아 햇볕도 비켜 가는 곳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녹슨 철길처럼 길게 누워 여름을 보냈다 기차를 타고 싶지 않았으므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고평 2리 마을회관 담벼락 아래 기적소리가 괭이밥 풀꽃의 목을 끊었다 빨랫줄은 자주 젖어 있었고 마를 새도 없이 저녁이 왔다 때로 역 대합실이 심심할 것 같아 으아, 하고 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 아프고, 아프다고 나 혼자 작아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빈집의 서까래 아래서 젖은 생각을 말리는 밤 강 ..

삼강체(三江體)*로 쓴 외상장부/홍영수

정지문을 열면 연기에 그을린 벽지에는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삼강체의 상형 문자가 그려져 있고 노 젓던 사공의 슬픈 가락과 보부상의 총총걸음의 외상값이 지우고 다시 쓴 가느다란 칼끝의 필획으로 쓰여있다. 연기에 그을린 정기의 벽에는 주전자 연적의 텁텁한 물을 뚝배기 벼루에 붓고 간간하게 배인 소금장수 땀의 먹으로 갈아 쓴 행간 속 외상장부가 농담의 붓으로 괴발개발 갈겨놓았다. 시끌벅적한 삼강주막에서 고단했던 그들이 하루를 안주 삼아 피로를 마실 때 늙마의 주모는 비워지는 주전자의 개수를 벽지에 새긴다. 칼끝 붓으로 휘갈긴 갈필의 메마른 삶일지라도 자오록한 연기에 그을린 먹빛 정지에서는 삼강체라는 주모만의 서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앞치마처럼 구겨져 힘들고 고된 하루지만 그만의 운필력으로 붓을 잡고..

홍영수 시 202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