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시인 58

기울기/안금자

기운다는 건 팽팽함을 내려놓는다는 것 꼿꼿하던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본다는 것 뜨거운 가슴을 서서히 식히며 서쪽으로 기우는 해처럼 지나간 시간 쪽으로 한껏 기울어 비로소 너를 온전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_안금자 시인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이렇듯 계절의 변화란 지구의 23.5도 기운 삐딱함 때문이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적 사고를 벗어난 코페르니쿠스, 그의 발상의 전환에 의해 지동설이 나왔고 이는 시야를 달리한 결과물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makes strange)’란 ‘거꾸로 보기’,‘삐딱하게 보기’라고 했다. 결국 예술의 기법이란 대상을 낯설게 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지금 우물 밖을 보려면 우물이라는 틀의 시각을 벗어나야 볼 수 있듯이..

가을 달밤/홍영수

마실 다녀오는 할머니 지팡이엔 달그림자가 뒤따른다. 사립문을 연다. 흰 고무신은 달빛 가루를 신었다. 달의 눈썹만큼 가벼운 두 발로 문지방을 넘는다. 하얀 머리카락에 걸린 별빛도 반짝반짝 안방으로 들어선다. 감잎 떨어진 소리를 귀에 건 귀뚜라미도 문풍지 틈새로 귀뚜루르 뛰어든다. 고요를 입고 사는 홀몸의 할머니 가을밤의 달빛과 숨결이 고요를 벗겨준다.

홍영수 시 2022.11.13

수의(壽衣)를 입은 강 / 홍영수

아가미의 호흡이 멈춘 물고기들물녘에 죽음의 향연이다 혈관 막힌 강줄기녹색으로 물든 눈꺼풀 없는 두 눈자유형의 동작을 잃고서주검의 배영으로 물 위에 누워있다 녹조의 수의를 입은 강댐을 봉분 삼아 저승으로 간 물고기 떼흐물흐물한 사체엔 느물느물한 쉬파리 떼하품하듯 멈춰버린 민물조개 곁에몇 알의 모래는 빛을 잃고 묵념 중이다.어쩌다 끊긴, 천고의 물길무젖은 달빛이 녹색 향을 피운다. 떼죽음 된 수면의 어류 전시장아무런 잘못 없다는 듯창자를 내밀며 죽음의 기도를 한다어부의 손길에 터진 부레가 부풀기를철새의 날갯짓에 지느러미가 파닥거리기를봄비의 어루만짐에 산란의 축복이 내리기를  흘러야 할 흐름이 흐르지 않아잿빛에서 초록으로 변해가며녹조의 암세포가 전이 된, 강은말기 암이다.---------------------..

홍영수 시 2022.11.09

문학과 예술, 고난과 역경에서 피어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이 클수록 어딘가에 기대고 싶고 매달리고 싶다. 사실 인간은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 같은데 오히려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살아가는 과정에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되고, 이웃과 타인들에게서 때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러한 아픔과 상처를 겪고 입게 될 때 문학과 예술이 참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이럴 때일수록 그냥 묻고 잊기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돌파구를 찾고 방향성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누군가의 시집 한 권, 어느 자그마한 음악회, 인사동 골목길 어귀에 있는 자그마한 화랑, 늦가을 정취를 읊조리는 시낭송회 등에서 자신만의 시간과 생각을 가지고 먹고사니즘에..

고향이 되리/홍영수

고향이 되리 그리움마저 아끼고 싶을 때 황톳길 따라 걷다가 돌부리에 부딪히는 검정 고무 신발이 되리 향수가 긴 팔 벌려 안아주는 곳 구불구불 흙먼지 길 동구 밖 돌아서며 내 안을 걸어가는 길이 되리, 동무가 되리 바람 불어 찢어진 비닐우산 낮게 쓰고 어깻죽지에 책보를 가로 메고 뛰어가는 학교가 되리, 공부가 되리 나였던 나는 어디 갔을까 너였던 너는 어디 갔을까 담쟁이는 돌담에서 여전히 꿈을 꾸고 초가지붕은 지금도 하양 박꽃을 기다리는 곳 돌담을 스치는 바람의 꿈이 되리 박꽃에 물들어 반짝이는 은하수가 되리 온몸에 사리로 박힌 향수(鄕愁)가 먼발치 굴뚝에서 눈물로 피어오르는 곳 정든 그리움이 되리, 그리움의 품이 되리. 비의 숨결과 바람의 손결이 스며든 마루판이 홀로 된 할머니의 말투보다 더 느리게 표정..

홍영수 시 2022.11.06

발견을 통한 의미 찾기와 동심을 일깨우는 마음의 눈

홍영수(시인, 문학평론가) 현대문학의 시작으로 보는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소년』 창간지( 1908.11.1) 권두시로 발표된 11월 1일을‘동시의 날(2008)’로 정했고, 올해로 동시의 날 선포 13주년이 되는 해에 임내영 시인의 동시집『요리요리』를 읽었다. 어른의 관념과 자기 추측이나 회상만이 아닌, 어린이의 감성과 상상력을 북돋아 주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 할머니에 대한 동경과 사랑, 그리고 자기 체험적 요소들이 표출된 시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엔 다양한 색채의 동심이 채색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좋은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임내영 시인이 그렇다. 시는 산문과 다르게 연과 행이라는 압축된 형식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장르이다. ..

두 딸에게 / 홍영수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날마다 떠나야 한다머무는 삶이 아니라떠나는 삶. 네모의 액자 속그 안에 낀 한 폭의 그림이 되지 말고그곳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창밖을 바라보라, 그리고한 조각 뜬구름과 벗이 되어 얘기하라 습관이라는 의자에 앉지 말고안락이라는 침대에 눕지 마라광활한 대지에서발길 닿는 데로 뛰어다니는 야생마처럼살 곳 찾아 옮겨 다니는 유목민이 되어라. 때론 불안하기도 하고위험할지라도익숙한 굴레에서 박차고 뛰쳐나와너의 고정된 틀을 과감히 파괴해라 유유히 흐르는 물살을 타지 말고거친 물살을 거스르는 물고기가 되어라.-------------------------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

홍영수 시 2022.11.04

존재의 꿈을 꾸다/홍영수

난 외롭다 늘 푸른 동해 땅끝에 우뚝 서서 해돋이 해넘이를 함께 하며 어부와 새들을 위한 홀로 선 등대이기에 난 슬프다 거친 풍랑과 귀때기를 때리는 바람을 안고 억수 세월 뜬눈으로 저 먼 백두대간 바라기를 하기에 난 아프다 일렁이는 큰 파도 같은 거짓 입술과 거센 바람의 억지스러운 몸짓 언어로 정절의 두 발로 서 있는 나를 괴롭히기에 난 괜찮다 수많은 세월, 터럭만큼의 몸도 허락하지 않았고 여태껏 티끌만큼의 눈 한 번 팔지 않는 지조로 존재의 꿈을 꾸었기에, 침묵 속 침묵으로.

홍영수 시 2022.11.03

삼강체(三江體)*로 쓴 외상장부/홍영수

정지문을 열면 연기에 그을린 벽지에는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삼강체의 상형 문자가 그려져 있고 노 젓던 사공의 슬픈 가락과 보부상의 총총걸음의 외상값이 지우고 다시 쓴 가느다란 칼끝의 필획으로 쓰여있다. 연기에 그을린 정기의 벽에는 주전자 연적의 텁텁한 물을 뚝배기 벼루에 붓고 간간하게 배인 소금장수 땀의 먹으로 갈아 쓴 행간 속 외상장부가 농담의 붓으로 괴발개발 갈겨놓았다. 시끌벅적한 삼강주막에서 고단했던 그들이 하루를 안주 삼아 피로를 마실 때 늙마의 주모는 비워지는 주전자의 개수를 벽지에 새긴다. 칼끝 붓으로 휘갈긴 갈필의 메마른 삶일지라도 자오록한 연기에 그을린 먹빛 정지에서는 삼강체라는 주모만의 서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앞치마처럼 구겨져 힘들고 고된 하루지만 그만의 운필력으로 붓을 잡고..

홍영수 시 2022.11.03

운림산방/홍영수

운무에 자오록이 덮인, 첨찰산그리메에 포근히 안기어묵향으로 피어난 남화의 탯자리배롱나무 우듬지에 맺힌묵신(墨神)의 얼은연못 물비늘에 나울나울하고발묵한 연잎 위에진도아리랑 가락이 번져갈 때갈필의 붓끝은 비수처럼 번듯번듯하다. 대를 이어온 화풍의 맥은구름 숲속에 맥맥이 흐르고동다송을 꼴마리에 차고 온 초의와세한도를 허리춤에 동여맨 추사의 혼이아슴찮게 들명날명 하는 운림각이곳에 들어서면비운 가슴은 화선지가 되고한 올의 머리카락은 붓이 된다. 먹 가는 소리가사천리 바람살에 뒤울리며진도의 뼛속에 골수로 맺힐 때남종화는 회화의 주옥편이 된다.-------------------------------프로필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제4회 한탄강문학상..

홍영수 시 202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