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내게, 보령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 먼 길을 달려와 마주한 보령 바다는
한 자락의 푸른 옷깃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파도가 섬 한 채를 풀었다가 조였다가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수평선은
한 줄의 단호한 문장으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읽어 낼 수 없는 바다의 안부
말수 적은 아버지 같았다
어둑한 저녁의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와
구석진 마당가에 빈 지게로 우두커니 서서
발 디딜 곳 없는 어둠을 부려 놓곤 했었다
어스름한 저녁의 수평선은
고단한 생의 시작과 끝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할 말들을 알아챈 건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버지의 삶도 저토록 붉고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었을까.
다시 잿빛으로
타다 남은 검붉은 밑불로 남아
세상의 바닥을 단 한 번만이라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을까
아버지의 핏빛 노을은
하늘로 번지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
40년 만에 마주한 중년의 아들에게
불타오르는 노을의 마지막 문장을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해후의 마중물 같은
검붉은 노을의 심장은 뜨거웠다
온몸을 휘감고 도는 바람의 잔등은 차가웠다
거칠고도 짠 아버지의 비릿한 냄새는
노을과 함께
그렇게 바닷속으로 잠잠히 젖어 들어 갔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한순간 뜨겁게 불살랐으나
어느 순간 차갑게 스러져 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대신 읽어주는
한 권의 노을, 보령 바다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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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쌀 한 톨에서 나뭇잎 하나, 바람 한 줄기에서 시를 따고 집어 들 듯, 시적 화자는 말 없던 보령 바다가“잔잔한 파도가 섬 한 채를 들었다 조였다가”라고 한다. 그러한 바다에 귀를 기울이다가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에서 찬란하고 붉게 타오르는 아버지의 삶을 떠올린다. 이 순간 시인의 머릿속의 잠든 초인종을 눌렀던 것은 바로 ‘노을’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마지막 연 첫 행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와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대신 읽어주는/한 권의 노을, 보령 바다”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화자는 노을이라는 심상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한 권의 노을’로 이미지화한다. 그 한 권의 노을이라는 책 속에 아버지의 삶에 대한 추억, 그리움, 기억 등이 페이지마다 구구절절이 노을빛의 붉은 해서체로 때로는 초서체로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 보령 바다의 노을, 그 노을을 차마 어찌 한 잔 마시고 싶지 않았겠는가?
‘노을’이라는 실존적 현상에서 아버지에 대한 정체성과 내면성을 들어내면서 “40년 만에 마주한 중년의 아들에게/불타오르는 노을의 마지막 문장을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시상을 펼치고 있다. 표층적 심상인 보령의 앞바다에서 심층적 이미지인 노을을 형상화해 아버지를 그리는 것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보령 앞바다보다 더 넓고 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인 삶을 관통하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있을 수 없다. 노을빛 한 줌 한 알을 가슴으로 느끼며 푸른 옷깃의 바다와 노을빛 바다의 대칭적 표현으로 아버지의 삶을 읽어내는 시인의 시혼에 두 손을 잡는다.
그 어떤 문학, 예술작품에서 커다란 울림을 만난다는 것은 속 깊은 가슴 인연이다. 감동을 주는 작품도 때론, 스쳐 지나간 바람에 묻힌 향기처럼 날아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긴 여운으로 영혼에 스미고 마음의 살갗에 무늬로 박히는 작품이 있다.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의 시가 그러하다.
그렇다. 햇귀를 맞이하며 해가 떠오르는 아침의 수평선과 벌겋게 물들며 해를 집어넣는 수평선은 시작과 끝의 연속이다. 이러한 수평선에 반해 우리 아버지들의 삶은 시작의 끝에도 끝의 끝에도 오직 자식만 있을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들에게 모든 걸 다 내주고 나면, 아버지는 저토록 서녘의 형형한 노을빛처럼 빛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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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https://blog.kakaocdn.net/dn/leMXV/btr9siX4QA9/R1JLDhB1ypdULkjKCADcyk/img.jpg)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 부천시, 경기도 와 국회의 뉴스 그리고 삶을 전하는 지방신문
www.thenewso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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