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시 평론

동짓달 기나긴 밤에 / 황진이

홍영수 시인(jisrak) 2023. 11. 17. 12:40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기다림은 행복을 찾는 순간일까, 누굴 저리도 애타게 기다릴까.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임이 오지 않을까? 성엣장 같은 차가운,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밤은 깊어 가는데∙∙∙… 송도삼절의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황진이, 밤중에 가슴에서 부화한 그리움 한 줌 안겨준 그이는 하룻밤 풋사랑 아님, 정주고 떠난 풍류객의 사대부는 아니었을까? 행여 그 임이 언제 올지 몰라 기나긴 밤의 시간을 한 토막 잘라낸다니, 얼마나 겨울밤 동치미 같은 맛 난 표현인가.

 

그 시간을 봄바람 같은 따스한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거든 펴 드린다니, 이토록 으늑한 정성, 장작불에 달궈진 사랑방 구들장인들 이보다 더할까.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풍류객인 임제가 평안도 관직에 부임하기도 전 파직 당할 만하지 않은가, 한 번쯤 황진이 같은 여성에 젖어보고 싶지 않은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이 엄동설한에.

 

동짓달 기나긴 밤에 황진이가 임이 오길 바라는 밀물에 기다림이었다면, 폭풍한설에 실연의 아픔을 안고 방황을 하며 괴로운 심사를 토하며 겨울 여행을 떠나는 썰물의 떠남이 있다.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곡 왕 슈베르트다.

 

죽기 한 해 전 빌헬름 뮐러의 시에 24곡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짓는데 그 마지막 곡이 ‘Der Leiermann 거리의 樂士이다. 황진이와 슈베르트는 기다림과 떠남의 엇갈린 운명을 노래한다. 기다림은 떠남을 예고하고 떠남은 또 다른 기다림을 예약하는 모순의 진리 속에 동일성의 사유를 발견한다.

 

황진이가 시조 한 수 짓고서 밤새도록 임 그리며 읊조린 것처럼 슈베르트 또한 거리의 악사를 마치 250여 년 앞선 황진이 시조처럼 길게 늘어뜨리며 우울하게 슬픈 곡조로 읊조리며 여운을 남긴다. 사랑하는 임의 곁을 떠나면서 차마 떠나기 싫은 마음에서일까. 슈베르트와 같은 나이(31)에 세상을 등진 명동백작 시인 박인환도 그랬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실연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 우린 그 누구도 타인의 비애를 알지 못한다. 문학과 음악, 오감으로 스며든 향기여! 난 동짓날을 며칠 앞두고 삼경의 겨울밤에 이 곡을 들으며 황진이가 되어 겨울 여인네가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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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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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nyDTPuaFC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