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의 시학
필자는 농부의 아들이었다. 당시 소는 대학 등록금이었으며 농사 밑천이었다. 논밭 갈이 온종일 하고 돌아온 소에게 소죽을 끓여 주면 다 먹고 난 뒤 가만히 앉아 되새김한다. 그 모습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소의 주식은 다양한 풀이다. 일과를 끝내고 난 뒤 위 속에 저장된 풀의 종류를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며 풀 맛, 즉 의미를 곱씹고 소화 시키는 모습이 선정에 든 큰 선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수호 시인의 연작시‘인간관계론’을 ‘반추(反芻)의 시학’이라 하고 싶다. 왜냐면 눈으로는 쉽게 읽히지만, 눈을 떼는 순간 눈을 감게 만들어 내가 뭘 봤지? 하며 사색에 잠기게 한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의문부호에도 물음표가 붙으며 시작이 있되 마침표가 없다. 그러므로 또 다른 생각의 연속이다. 소위 말한 ‘관계론’이다. 또한 흡사 宋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의 禪詩적 느낌마저 든다.
여기서 ‘관계’는 사이의 존재이다. 人間, 時間 등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아니라 단어 그 자체가 의미하듯 다른 것과의 ‘間’ 즉 ‘사이’,‘틈새’가 본질이다. 우린 그 틈새를 메우고, 뛰어넘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 ‘사이’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든 사물이든 간에 관계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불변이 아닌 쉼 없는 변화의 연속이고 탈주이다. 한 점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듯 부단히 관계를 맺으며 해체되고 변화하며 탈주한다. 동양적 사유가 바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이다. 대표적 關係論이 바로 불교의 緣起論이다.
이렇듯 다소 무거운 詩題로 연작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시적인 철학적 세계관이 없으면 창작을 할 수가 없다. 술잔에 계속 술을 따르면 넘치듯 세월의 부피만큼 절차탁마한 뒤에라야 시인과 같은 墨香과 文氣가 풍기고 서린다. 철학적 시제인 만큼 다소 서두가 길어졌다.
인간관계론 1
나는 누구인가
오래된 질문이다
답을 얻고 싶어서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산과 들을 거닐다 보면 이름 모를 들꽃과 초목들에 마음이 다가갈 때가 있다. 왜냐면 ‘나’라는 존재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 안에 갇혀 불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답을 알 수도 없고 어쩜, 답에 대해 알 수 없음을 알고 질문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인은 ‘답을 얻고 싶어서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름 지어진 나와 관계되는 타인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오직 답이 있다면 관계 속에서 ‘쉼 없이 질문을 불태우는 것이다.’
인간관계론 11
사과는 과일이다
정물이며 유혹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깨달음을 주는
둥근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머릿속에 저장된 사회의 관습적이고 공인된 언어를 랑그라 했고, 특정한 발화 장소에서 발음되는 언어를 파롤이라 했다. ‘사과’는 우리가 쓰고 있는 하나의 약속된 표기이다. 즉 기표일 뿐이다. 그리고 붉고, 둥글고, 새콤달콤하게 느끼는 것은 기의이다. 같은 ‘사과’를 보고 사람에 따라 달리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사과를 보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담과 사과,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은 애플사의 로고를 떠 올릴 것이다. 이렇듯 랑그와 파롤,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은 동전의 양면성과 같다. 또 다른 이에게는 ‘사과’의 둥그런 형태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면‘둥근 사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시니피에를 상실하면 시니피앙의 이미지도 상실된다. 시인은 ‘사과’를 통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상관관계의 메시지를 던지며 시인들의 언어학에 관심도를 증폭시키고 있다.
인간관계론 12
커피라는 글씨에서는
커피 냄새가 난다
“이미지는 현혹하고 당신을 미끼로 문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작품이 생각난다. 그림의 파이프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파이프는 아니다. 마그리트가 얘기했듯이 “이것이 파이프라면 잡고 담배를 피워보시오.”라고 했다.
주관적인 해석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미지로 전환한다. 물론 몸과 마음에 베인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담배 피우는 파이프를 떠올리는 것은 흔히 말한 ‘생각의 관성’ 때문이다.
‘커피’라는 글씨는 글씨일 뿐 마시는 커피는 아니다. 그림의 파이프가 진짜 파이프가 아니듯. 그런데 시인은 글자에서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한다. 그림의 파이프에서 담배 피우는 파이프를 읽어내듯,
‘커피’라는 글씨는 글씨이면서 상표고, 상표이면서 글씨다. 또한 글자이지만, 글자가 아니고 상표이면서 상표도 아니다. 이렇듯 시는 언어의 개념과 의미를 뛰어넘어 인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한마디로 Memta language다.
2행의 짧은 시에서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를 느낀다. 어쩜 우린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론에서 혼돈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자판을 두드리는 필자의 눈에 식탁 위에 놓인 커피 상자에 쓰여 있는‘커피’라는 글자에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운다.
인간관계론 30
입 밖을 떠나면 공중에서 부서져 흩어져 버릴 말들을 가리지
않고 해 대는 사람이 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
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시나 보다. 침묵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메꾸어 준다는
사실도 잊고 계신듯하다.
혀는 있는데 문이 없다. 문이 없으니, 혀끝에서 수 없는 말들이 대책 없고 영양가 없이 쏟아져 나온다. 튀어나온 말을 닫는 문이 없으니‘공중에서 흩어져버릴 말’들이 튀어나온다. 쪽문이든 대문이든 문이 없다는 것은 침묵할 수 없다는 또 다른 말이다. 자신을 반추하는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 言과 行이 얼마나 일치할까? 하물며 “물에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 (無鑑於水 鑑於人:무감어수 감어인)”라 했듯이 타인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입에 문이 없어 침묵하지 못하고 계속 혀를 놀릴 수밖에 없다.
말할 때와 말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한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세 치의 혀끝을 가두고 잠글 외짝 문이든 철문이든 창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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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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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newsof.co.kr/news/view.php?no=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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