醉睡仙家覺後疑 (취수선가각후의) 취해 자던 신선 집 깨어보니 의아하다
白雲平壑月沈時 (백운평학월침시) 흰 구름은 골 가득 메우고 달이 지는 새벽녘
翛然獨出脩林外 (소연독출수임외) 주인 몰래 혼자 나와 긴 숲길 벗어나니
石逕筇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에게 들켰네.
술 취한 후 희미하게 눈을 뜨니 너붓한 반석이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으늑한 장면, 좋은 벗과 주거니 받거니, 달무리로 주안상 차리고, 솔잎 향 몇 방울 술잔에 떨어뜨리며 명지바람에 실려 온 실솔(蟋蟀) 울음소리로 세속의 찌든 귀 헹구면서, 맴도는 흰 달빛도 초대한 깔축없는 분위기에 실컷 마시고 쓰러졌다. 깨어보니 널부러져 있는 술상 앞에 주인은 쓰러져 코를 골고 주변을 살펴보니 골을 메운 흰 구름 雲海를 이뤘다.
밤새도록 마신 달도 취해 서녘으로 어슷하게 비틀거릴 무렵 미안한 마음에 슬며시 일어나 숲길 나서는데 돌길에 그만 지팡이 소리가 난다. 아뿔싸! 잠자던 새에게 들키고 말았다. 상영소견(觴詠消遣), 어찌 벗과 자연과 술잔 기울이며 시 한 대접 선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자의 자연에 대한 관조, 곰살궂은 마음씨, 익살 미의 ‘宿鳥知’에서 순수를 읽는다. 이로 인해 박순은 ‘숙조지선생(宿鳥知先生)’이라는 별호를 얻는다.
300년 후,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는 결곡한 대학자 박순에게 헌정하듯 곡 하나 짓는다. ‘달빛 ’(Clair de lune)‘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않고 단지 느끼게 한다. 바로 ‘분위기 음악’이다. 베를렌느의 시 ‘달빛’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1위에 선정되기도 한 곡이다. 知音의 벗과 달빛 친구 삼아 이슥토록 술잔 기울일 때, 적요가 적요롭게 숲에 내려앉을 때, 나뭇잎 사이를 타고 흐르는 곡 ‘달빛’, 몽환적 운율의 우주성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달빛이 내게 와서 빛나는 것일까.
내가 달빛 속에서 달이 된 것일까.
잡을 수 없는 신비로움
애매한 윤곽, 모호한 선에 핀
인상주의 모네와 르누아르
드뷔시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함으로 흐르는 멜로디
말하려 하지도 않고 느끼게 할 뿐
달빛의 몽환
꿈속의 달빛.
-필자의 드뷔시 <달빛>에 대한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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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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