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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칼럼] 촛불의 미학 - 코스미안뉴스
시골에서 소죽을 끓일 때 활활 타오르며 부넘기를 넘어 방고래의 구들장을 데우는 장작불이나 대학 MT 때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피웠던 낭만적인 모닥불 등은 불 피우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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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소죽을 끓일 때 활활 타오르며 부넘기를 넘어 방고래의 구들장을 데우는 장작불이나 대학 MT 때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피웠던 낭만적인 모닥불 등은 불 피우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러나 촛불은 손길 없이 그저 홀로 탄다. 그것은 곧 스스로 한 송이의 고독한 불꽃으로 피어오르며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광화문 광장이나, 국회의사당 앞의 드넓은 대로에서 장작불이나 모닥불이 아닌 고독한 망상가들의 수많은 촛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다. 장 드 보셰르의 시구 중에 “나의 사상은 불 속에서 사라졌다/그것으로 하여 내가 알게 된 껍질”,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내부다, 불꽃의 축(軸)이다” 시인의 말처럼 불꽃의 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힘찬 이미지의 다름이 아닌가 싶다.
미약한 것처럼 보이는 촛불은 약하듯 하지만 곧바로 선 불꽃이다. 훅 한 번 불면 꺼질지라도 밟히면 바로 일어서는 잡초 같은 생명이고 부정과 무법의 권력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힘이다. 촛불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중장년보다 청소년과 젊은 세대들이 훨씬 많다. 그들의 예민하고 올곧은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학교와 거리에서 촛불을 드는 모습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더 넓고 깊은 사유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리옹 시민들은 매년 12월 8일에 창가에 촛불을 켠다. 그리고 촛불을 들고 기도의 언덕을 오른다고 한다. 이유는 19세 중반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았던 페스트의 공포가 리옹 도시를 휩쓸 때 시민들은 죽음의 공포를 떨치기 위해 촛불을 밝혔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을 이에 비추어 볼 때 비록 산자가 죽어가는 페스트는 아닐지라도 특정인의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모든 분야가 빛이 없는 어둡고, 메마르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이때, 이럴 때일수록 민초들의 한 줄기 촛불과 같은 밝은 희망의 silver lining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서 광장과 대로변에 모여 까마득히 밀려오는 어둠의 세상을 밝힐 염원의 촛불이 물리적이지 않고 평화스럽게 반짝이는 모습으로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광장에서 겪은 일이다. 촛불은 가녀린 바람에도 쉽게 꺼진다. 그렇지만 장작불과 모닥불처럼 손길이 필요하지 않고 다시 켜면 꺼뜨리지 않고 스스로 불타오른다. 이렇듯 광장과 거리에서 만난 촛불 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절망 끝 희망의 낯빛을 볼 수 있다.
집에 돌아와 서재의 구석진 곳에서 <촛불의 미학>을 꺼내 든다.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시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마지막 저서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하나의 불꽃 속에 세계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불꽃은 하나의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떤 내적 존재의 눈에 보이는 표징이며 숨어 있는 힘의 표징이 아닌가?”(P.41)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절망감과 배신감 등으로 짙은 어둠의 세계를 만나 온기 없는 영혼으로 갇힐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한 줄기 빛을 갈망하며 꿈틀거리는 용틀임을 하게 된다. 그것은 부조리한 것들과 맞서 싸우고 투쟁하는 불빛의 마음이다. 그래서 저 작은 촛불의 빛에 심리적인 실재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현실의 광장과 거리에서.
저들이 촛불을 켜 들고 거리를 나서는 것은 내 마음의 등불을 내 거는 자신만의 의식이다. 무엇보다 벌겋게 눈 뜨고 귀를 여는 자에게 억압과 폭력을 가하는 세력에게 저항하는 깨어있는 의식의 징표이다. 누군가는 “촛불은 흰빛의 상승과 붉은 빛의 하강, 가치와 반가치가 싸우는 결투장“이라고 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아닌, 수직의 침묵으로 눈물 흘리며 타오르는 촛불은 고독한 불꽃이다. 여의도 광장의 결투장에서 하강이 아닌 상승이 반가치가 아닌 가치가 승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權不十年(권불십년)이다. 태초의 모든 것들은 한 번 왔다 다시 돌아가는 게 자연의 섭리다. 박인희의 노래 <모닥불>에서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의 노랫말이 지금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한시를 보자.
金樽美酒(금준미주) / 이몽룡(李夢龍)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촉누낙시민누낙)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금독에 담긴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그릇에 담긴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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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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