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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칼럼] 짧은 생각, 왜 문학, 예술은 고독할까 - 코스미안뉴스
지금은 집을 이사하는 풍경도 이삿짐 전용차의 사다리를 이용해 아파트 몇십 층까지 오르내리며 옮긴다. 예전엔 이삿짐 나르는 풍경은 오픈된 일반 트럭에 세간살이를 싣고 옮겼다. 그때 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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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집을 이사하는 풍경도 이삿짐 전용차의 사다리를 이용해 아파트 몇십 층까지 오르내리며 옮긴다. 예전엔 이삿짐 나르는 풍경은 오픈된 일반 트럭에 세간살이를 싣고 옮겼다. 그때 피아노, 커다란 냉장고, TV, 골프채 등과 읽어보지 않은 장식용의 전집류 책들을 싣고 가는 모습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간단한 살림살이와 가난한 자의 등록필증서 같은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싣고 가는 이삿짐 차량을 볼 수 있었다.
왜,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통해 그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궁구하는 사람들은 가난할까, 그래서 다소 거친 표현이지만, 돈과 권력과 기름진 얼굴들에게 무시당하고 검은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릴까? “책은 인생의 스승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등의 아포리즘은 가난 증명서 같은 표어인가? 아님, 그 길은 가난과, 고통과 패배와 고독의 길인가? 문학 예술인들은 유독 패배와 좌절과 실패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재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세속적인 물질적 행복과 예술적인 정신적 승리는 결코 병존할 수 없지 않다는게 다반사이다. 파스칼의 말이 생각난다. “너는 한 다리가 짧은 절름발이다” 고 말하면, 그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자신의 다리가 짧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너는 약간 모자란다.” 하면 곧바로 화를 낸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혹시 모자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졸부나 복부인이 시 한 줄, 그림 한 점, 음악 한 곡 제대로 읽지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그렇게 예술작품 하나 감상할 줄 모르면서 고가의 명품 가방이나, 값비싸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AI가 생성한 듯한 외모, 평민은 알 수 없는 시계와 액세서리 등을 자랑삼아 보여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정한 문학, 예술인들은 세속적으로 불행할지라도 그 너머의 만족감을 예술의 창조적 가치를 통해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을 한다. 비록 경제적 불편을 겪더라도 물질적 풍요에 얽매이기보다는 정신적 풍요와 자유로움에 가치 중심을 둬야 한다면 그들은 문학 예술인의 허황한 망상에 사로잡힌 꿈같은 얘기라고 하지 않을까?
이러한 시인이나 예술가에게는 독자와 대중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의식하든, 않든 그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창작한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볼 때 독자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과연 문학 예술인들에게 독자와 대중을 망각해도 좋은 것일까.? 하긴, “예술을 위한 예술” 또는, “자신만을 위한 예술”을 목표로 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현대의 문학 예술인들이 황량한 사막지대를 초래한 것인지 모른다. 독자와 대중들이 문학, 예술을 등진 것일까? 아님, 문학인과 예술가들이 등진 것일까? 어쩜, 한쪽만의 이유가 아닌 양쪽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고립과 고독은 아닐까?
지난해(2023년)에 우리나라 1인 독서량은 3, 9권이다. 그리고 성인의 60%가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시간이 없다’, ‘스마트 폰 사용’ 등으로 조사되었다. 요즘은 웹툰, 웹소설, 전자책 등의 독서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점으로 관련 도서들의 독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제발 일시적 현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출판업계의 위기란 말이 나오는 요즘이다.
체코 출신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 광대>는 당시의 문학 예술가의 고독을 상징화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수십 년 동안 서커스단에서 동물들의 마구간 옆 작은 우리 안에서 단식한다. 그 모습을 관객들은 매우 흥미 있게 관심을 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졸 듯이 우리 안에 갇혀 단식을 계속하는 광대의 모습과 표정만 보다가 점점 그 곁을 떠난다. 그것은 앙상한 뼈와 축 늘어진 광대의 모습보다 왕성한 식욕과 화려한 털가죽의 표범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중은 단식 광대의 구경에 실증을 느껴 떠났다. 그래서 서커스단은 그 우리 안에 표범을 들여놓는다.
단식한다는 것은 물질, 세속적인 욕망을 거부하는 행위이고 표범과 같은 육체적, 세속적 탐욕 등과 같은 짐승들의 성정에 대한 경멸이고 반항이다. 여기서 단식자는 현실을 부정하는 문예 창작의 상징이 정신적 주체자임을 뜻한다. 그것은 물질과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순수한 영혼의 세계이고, 이에 반해 표범은 강한 식욕과 쾌락, 질주 본능의 육체, 창조와 의문이 없는 무한한 식욕과 야성의 행동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단식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표범에게 돌렸다는 것은 곧 정신적 가치와 자유로움이 아닌, 세속적인 욕망과 탐욕과 쾌락의 길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barbarian의 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13~14세기, 피렌체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원전 8세기경 호머의 일리아드 등의 시를 마차꾼까지 읊조렸다고 한다. 가끔 퇴근길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 구입하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시인에게 계관을 씌워주었던 황금시대는 지나간 것인가? 갈수록 합리적이지 않은 의식으로 위축되어 가는 이 시대에 스스로라도 월계관을 직접 씌워서 계관시인, 계관 예술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유는 시인은 미완성의 설익은 씨앗들을 열정의 빛으로 키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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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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