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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예전 시골 사랑방은 더욱더 뜨거운 장작불로 아랫목의 구들장을 데우고 바쁜 농사일 끝마치면 요즘과는 다르게 사랑방에 모여서 흰 대접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씩 나눠마셨다. 곁들인 안주는 맨손으로 김치 한 쪼가리로 때우고 소매 끝자락으로 입술을 쓰~윽 문질렀다. 그리고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아 거나하게 취하면 판소리, 남도창, 그리고 육자배기 한 자락씩 메기고 받고 했던 아버님들을 떠 올려 본다. 특히 이맘때 비록 전문 창자가 아니라도 촌노촌부(村老村婦)가 부르던 육자배기의 맛은 김장 김치의 곰삭힌 묵은지에 푹 삶은 수육과 뚝사발에 부은 잘 익은 막걸리와 어울린 융합의 맛이었다.
민요는 지난 시대와 생활상을 면밀하게 보여주기에 우리네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경제적인 가치보다 정신적 풍요에, 삶을 피하지 않고 껴안고서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노랫가락에는 그들의 놀이와 일, 삶 그리고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문화적 산물이다. 육자배기는 남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요이고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음악이다. 그리고 ‘육자배기토리’, 또는 ‘육자배기조’라고 일컬을 만큼 남도음악의 특질을 가장 잘 나타내고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노래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가창이나 감상을 할 수 있게 큼, 잘 다루지 않고 있기도 하다.
육자배기는 ‘미 ‧ 라 ‧ 도’ 세 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도음악의 특징인 ‘떠는 목’과 ‘꺾는 목’으로 이루어진 육자배기의 ‘다루치는’기법은 판소리와 차별되는 ‘육자배기목’의 특징을 지니는데 여기서 육자배기토리의 정한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육자배기 사설은 시조와 같이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시조의 형식처럼 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4 음보 총 12 음보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육자배기는 남도잡가의 한 곡으로 전문적인 창자에 의해 불리었을 뿐만, 아니라 남도지방 사람들은 웬만하면 입으로 흥얼거릴 줄 아는 민요 중 하나가 육자배기이다.
서정주의 시나 채만식의 소설에서도 인용되는 육자배기는 한 절씩 노래를 부르고 그 끝에서는 다 함께 ‘구나 헤’라는 후렴구를 부르며 마무리한다. 진도의 인간문화재 조공례 선생님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육자배기를 부르는 희귀 영상(1995년)을 유튜브를 통해 보았다. 역시 동네분들 또한 대단한 소리꾼이었다. ‘소리 한 자락 못하면 진도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긴 예전엔 남도 사람치고 육자배기 한 가락 못 부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선지식보다 열린 감수성과 자유로운 마음가짐으로 가능한 많은 작품들을 보고 듣고 만나야 한다. 비록 육자배기가 전문적인 창자 외에 일반사람들이 부르기에는 다소 어려운 민요일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듣고 또 들으며 다가설 때 매혹적인 육자배기에서 멋과 맛의 체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태도가 고정된 관념에 얽매여 있으면 예술의 다양성의 가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것이 생산되고 수용되는 시대, 사회적인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지방의 생활과 풍속, 언어와 감정 등의 특질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지방에 따라 각기 지닌 음악 양식이 형성되어 있다.
이 말인즉슨 민요가 그 지방 사람들의 기호나 정서에 의해 전승되고 표출된 것이라 할 때 우린 민요를 배워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그 지방의 삶 속에 구비 전승되어 오는 고유의 정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육자배기는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음악인 데 반해 일반인들이 부르는 노래라기보다는 그저 남도민요조로 알려졌을 뿐 전공자들 외에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음악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한 지방,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정서를 반영해 불려 온 노래의 형식 등을 살펴본다는 것은 전반적인 음악의 전승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예술미 중에서 가장 숭고한 것을 비장미로 보는, 반면에 슬픔이 인간의 감정을 순수하게 정화해 준다고 하는 문학가도 있다. 비장미로 승화시키는 육자배기는 남도의 전형적인 민요로서 남도의 서정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노래다. 비단 남도의 정서뿐만 아니라 남도의 붉은 황톳빛과 영산강 물굽이에 굽어 도는 비릿하고 애잔한 향수와 세월의 풍상이 서려 있고, 흐르는 곡조에는 남도의 고유한 풍습과 정한이 맺혀 흐르기에 남도의 정서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다. 육자배기는 남도 문화의 정수요 자화상이며 여섯 박자에 맺힌 흥(興)과 한(恨)의 꽃봉오리이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으로 끝맺을까 한다. 아버지의 소개로 경찰과 결혼한 창무극의 1인자 공옥진은 6‧25 때 인민군에 의해 경찰 가족이었기에 끌려가서 짚 더미 속에 숨어있다가 죽창으로 이곳저곳 찔리며 붙잡혔다. 그때 ‘육자배기’를 불렀는데 그 처연한 노랫소리가 그를 살렸다고 한다. 그 얼마나 정(情)과 한(恨)이 맺힌, 그래서 누군가의 심장에 한 울림의 맥놀이로 울렸으면 그리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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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명창 이화중선, 출처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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