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 온 곳 치고는 적당히 안전했다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강을 따라 내려가던 철길이 물이 불어 잠깐 멈칫하는 곳 슬레이트 지붕이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을 흉내 내어 코스모스들이 철로 변에서 연애하는 곳 빗물 고인 길바닥을 돌아 햇볕도 비켜 가는 곳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녹슨 철길처럼 길게 누워 여름을 보냈다 기차를 타고 싶지 않았으므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고평 2리 마을회관 담벼락 아래 기적소리가 괭이밥 풀꽃의 목을 끊었다 빨랫줄은 자주 젖어 있었고 마를 새도 없이 저녁이 왔다 때로 역 대합실이 심심할 것 같아 으아, 하고 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 아프고, 아프다고 나 혼자 작아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빈집의 서까래 아래서 젖은 생각을 말리는 밤 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