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다녀온 할머니 지팡이 뒤로 달그림자 딸랑딸랑 뒤따른다. 달빛 가루 분칠한 흰 고무신의 인기척에 반쯤 기운 사립문이 삐거덕 열리고 머리카락에 흩뿌린 별빛도 가만가만 들어선다. 종일 외로웠던 안방의 아랫목이 문지방을 엎드려 넘는 홀몸을 벌떡 일어나 반긴다. 창호에 비친 나풀나풀한 댓잎의 몸짓을 눈짓으로 잡아당겨 베개 삼아 누울 때 뒤뜰 된장독의 곰삭는 소리에 텃밭의 풋고추들이 놀란 듯 흔들거리고 깨물어 아픈 손가락을 떠올릴 때 벽에 걸린 액자 속 미소들이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허리 곧은 시절에 미처 듣지 못했던 바래고 숨죽였던 빛과 소리가 저물어 가는 생의 귀퉁이에 보이고 들리면서 은밀한 물보라를 일으켜 눈과 귀를 덮친다. 홀몸은 평상복인 고요를 고요롭게 벗으며 망각의 풍경 조각들을 다문다문 주워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