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현 시인 2

경북선 물소리 배차 시간표/황주현

물소리에도 정각이 있습니다 정오의 햇살은 물 도리에서 가끔 물의 보폭을 맞추느라 연착할 때 있습니다 온갖 지류에서 탑승한 물 색깔들은 쉼 없이 덜컹거립니다 덜컹거린다는 것, 그건 물이 달린다는 뜻입니다 속도를 조절하는 물의 바퀴가 있다는 뜻입니다 샛강 속도로 달리는 이 완행, 그래서 늘 적자랍니다 때론 어느 집 마당 옆을 민망하게 지나치기도 하고 군불을 때는 저녁연기나 애호박 달린 호박 줄기와 잠깐 그 속도를 다투기도 하지만 완행은 저의 소리를 세면서 달립니다 한때는 나름 근사치의 시계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완행이 지나가면 마을은 아침상을 차리기도 하고 저녁상을 물리기도 했었습니다 학교 종소리보다 먼저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부르곤 했었습니다 용궁역 지나 큰 바위에 직선을 양보하고 옥산역 비탈진 경사면에..

나의 글 外 2023.11.01

고평역(驛) 가는 길 / 황주현

도망쳐 온 곳 치고는 적당히 안전했다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강을 따라 내려가던 철길이 물이 불어 잠깐 멈칫하는 곳 슬레이트 지붕이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을 흉내 내어 코스모스들이 철로 변에서 연애하는 곳 빗물 고인 길바닥을 돌아 햇볕도 비켜 가는 곳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녹슨 철길처럼 길게 누워 여름을 보냈다 기차를 타고 싶지 않았으므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고평 2리 마을회관 담벼락 아래 기적소리가 괭이밥 풀꽃의 목을 끊었다 빨랫줄은 자주 젖어 있었고 마를 새도 없이 저녁이 왔다 때로 역 대합실이 심심할 것 같아 으아, 하고 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 아프고, 아프다고 나 혼자 작아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빈집의 서까래 아래서 젖은 생각을 말리는 밤 강 ..

나의 글 外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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