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홍랑(洪娘), 해어화(解語花)의 그 지독한 사랑

홍영수 시인(jisrak) 2023. 1. 7. 12:55

몸은 천민이요, 눈은 양반이라는 말처럼 이중적 신분 구조에 처했던 그들(妓生), 조선 시대 여성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예능적인 면은 평가 절하되고 娼妓(창기)와 동일 개념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시서화에 능한 예술인으로서 사회적 자리매김을 받아야 마땅한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채 왜곡된 성() 상품으로 이 시대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조선의 로는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그리고 성천의 김부용을 꼽고 있으나 홍랑(洪娘)’ 또한 이들에 비해 詩妓로서는 빠질 수 없는 기녀가 아닌가 한다. 그녀들의 예술적 행위는 지금도 무형 문화재로서 자리하고 있으며, 당시 전문 예인인 만능 엔터네이너로서의 그들을 일반적 호칭인‘기생妓生’이 아닌 예인으로서의기생伎生으로 부르면 어떨까. 홍랑의 시조 한 수를 보자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듸

자시난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살아서는 천민이었지만 죽어서는 양반이 된 평양기생 홍랑, 단 세 개의 로 된 짧은 평시조에 이렇게 애상적이고 여성적인 표현으로 떠나는 임에게 감정의 표출을 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임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고, 첫 구절의보내노라 임의 손대처럼 도치법을 써서 묏버들을 꺾어 주는 의미를 강조하고, 버들가지에 파릇파릇 돋아나오는 새잎을 통해 청순한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여자의 섬세함을 연상케 하는 시적 표현력은 홍랑이 詩妓임을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묏버들을 꺾어 잊지 말 것을 간절하게 바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이별의 한을 가슴에 안고 함관령에서 발길을 돌려만 했다. 그리고 고죽(孤竹) 최경창은 서울로 가야 했다.

 

홍랑의 애가 끓는 사랑의 간절함을 고죽이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이에 화답하듯 삼당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칠언절구 <송별 送別>, 마지막 구“지금도 함관령은 雲雨에 덮여 푸른 산길 어둡겠지.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라면서 남녀의

사랑표현인 운우지정(雲雨之情)’으로 끈끈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고구려 시대의황조가를 비롯해서 고려가요인 서경별곡정지상의 송인황진이의 시조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문학 작품이 있지만, 홍랑이나 고죽 또한 이에 못지않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퇴계는 기생 두향, 율곡은 기생 유지 회재 이언적은 경주 기생과 아연이애(我戀爾愛)의 정분을 나눴다. 삶의 지표인 주자학 시대의 선비들은 시· ···무는 교양과목이었고 관능적인 향락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기녀들은 그들의 풍류 대상이 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했다. 어쩜, 이들의 애정관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람을 평할 때는 주색은 논할 거리가 아니다(論人酒色之外)” 고 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식색(食色)은 인지대욕(人之大慾)이라, 인간의 먹는 것과 사랑의 본능을 억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백호 임제와 평양기생 한우(寒雨)의 이시회우(以詩會友)에서 보듯 주고받는 시문의 사랑표현이 매우 짙더라도 조금도 난(亂)하지 않고 추(醜)하지도 않다. 멋을 아는 사내대장부라면 일확천금의 술값을 지불한들 어떠하며, 기생 또한 풍류를 아는 백호 같은 사나이라면 날밤을 새운들 어떠했겠는가.

 

고죽과 홍랑이 헤어지고 난지 3년 뒤 고죽이 병들어 누었다는 소식을 홍랑은 듣는다. 그런데 당시에는 평안도나 함경도 사람은 서울에 못 들인다는 금법(禁法)’, 이라는 이상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그길로 일주일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해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비슷한 경우이지만 崇儒抑佛의 시책 때문인지 몰라도 스님들을 도성의 44대 문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때가 있었다. 동다송을 지은 초의 스님도 해남의 일지암에서 상경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양수리에 있는 수종사에서 머물러야 했다.

 

조선 시대의 기녀는 천인이었으나 조선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드문 여인들이었다. 그들이 천민계급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는 대상이긴 하였어도, 한편으로는 한자 때문에 천대받아 마른 명태처럼 매달리고 말라버린 우리말을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해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기녀들의 자유로운 감성은 그들의 재주에 따라 시로 남겨지고 문학사에 이름이 남겨지니 이러한 기녀의 면모들은 문학사뿐만 아니라 여성사적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듯 조선 사회는 한자를 사용해 시문학을 짓고 창작했던 시대였다. 한글을 언문으로 낮춰 취급하는 때에 홍랑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해 단 세 구절에 많을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한자 못지않은 우리말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산 윤선도의 시조 70여 수도 주옥같은 우리말을 사용한 작품이듯이 말이다.

 

오래전, 천안 광덕사 근처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의 묘소와 부안 매창뜸의 매창 묘소 등을 답사와 문학기행을 다녀왔었다. 파주 교하동에 있는 홍랑(詩人洪娘之墓), 그는 고죽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아래 죽어서도 지금까지 살아있다.

 

칸트는 사랑은 순수한 현상이라 했던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영원하고 순수한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신분의 귀천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홍랑과 고죽 같은..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홍랑 묘 앞에서' 홍영수 사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