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은 아주 매혹적이다. 그 이유는 일상적인 삶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과 예술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사고와 감수성, 선지식보다는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문학의 깊이와 예술적 가치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에서 마시는 한 잔의 감흥과 어디서 들려오는 한 모금의 음악, 그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가. 이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게 문학과 음악이다. 새소리와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적 요소로 다가오듯, 문학 또한 그러한 소리 너머의 보이지도 들을 수도 없는 것에서 시인은 시혼을 일깨우고 프시케의 외침이 들린다. 이 엄동설한에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과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 뮤즈를 만나보자.
冬至(동지)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春風(춘풍) 니불 아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누굴 저리도 애타게 기다릴까.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기다리는 임이 혹여 오실까? 성엣장 같은 차가운 동지섣달의 밤이 깊어 간다. 송도삼절의 조선 최고 여류시인 황진이, 한겨울 밤중에 가슴에서 부화한 그리움 한 줌 안겨준 그이는 하룻밤 풋사랑 아님, 정 주고 떠난 풍류객일까? 누가 되었든 그 임이 언제 올지 몰라 기나긴 밤 시간의 허리 한 토막 잘라낸다니, 얼마나 겨울밤 동치미 같은 맛 난 표현인가.
그 시간을 봄바람 같은 따스한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거든 펴 드린다니, 이토록 으늑한 정성, 장작불에 달궈진 사랑방 구들장인들 이보다 더 하겠는가. 한 번쯤 황진이 같은 여성에 안겨서 젖어보고 싶지 않은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 엄동설한이라면 말이다.
시정잡배들 틈에서 비위나 맞추고 시중드는 범기凡妓가 아니었던 진랑, 그녀의 시는 난亂하고, 추醜하지도 않다. 특히 고루하고 어렵고 상투적인 한자 말을 쓰던 그 시대에 혀끝에 감기는 감칠맛 나는 우리말과 의태어 등을 사용했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시조작품 중에 아직도 이 작품을 능가하는 시조를 필자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동지섣달, 그토록 추운 겨울밤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랑하는 사람 아님, 보고픈 그 누군가가 찾아와 준다면, 구뷔구뷔 펴는 그의 시조에서 기다림은 행복을 찾는 순간이 아닐까 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우리의 문학작품 속 한국인의 심성은 ‘기다림’이 저변에 깔려있다. 월명대사가 누이를 그린 ‘제망매가’,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 그리고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황진이가 시조 한 수 짓고서 밤새도록 임 그리며 읊조린 시조에 애달픈 맘 고스란히 담긴‘기다림’의 미학적 작품이라면, 다른 한편에는 사랑한 사람과 ‘떠남’의 노래가 있다. 바로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쓴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에 황진이가 임이 오길 바라는 밀물의 ‘기다림’이었다면, 폭풍 한설에 실연의 아픔을 안고 방황하며 겨울 여행을 떠나는 썰물의 ‘떠남’이 있다. 바로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곡 왕 슈베르트다. 그는 죽기 한 해 전 빌헬름 뮐러의 시에 24곡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짓는다. 황진이와 슈베르트, 그들의 기다림과 떠남의 엇갈린 운명 속에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를 떠 올리게 한다. 기다림은 떠남을, 떠남은 또 다른 기다림을 예약하는 모순의 진리 속에 동일성의 사유를 발견하게 된다.
3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슈베르트의 삶에서 따스한 봄날이나 곱게 물든 가을의 계절은 없었다. 그렇지만 먹구름 사이의 한 줄기 햇살 같은 기쁨과 희망과 축복을 탐닉한 슈베르트 같은 사람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도 마지막 작품이 된 ‘겨울 나그네’의 악보를 수정했다. 그래서 생명이 단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동료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그는 헐벗고 굶주림 속에 자기만의 길을 홀로 걸었다. 그 길은 무덤을 향한 발걸음이었고 그 걸음 위에‘겨울 나그네’라는 유복자가 태어났다. 어둡고 삭막한 길을 흰 눈으로 색칠한 그의 연가곡은 눈 쌓인 황량한 벌판의 겨울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따스한 구들장을 그립게 한다.
겨울나기를 위해 월동준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잃어야 할 겨울도 없다. 설령 겨울을 맞이해도 겨울 나그네가 될 수 없다. 또한, 긴긴 동지섣달 밤의 허리를 반 토막 내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상실할 기다림도 없다. 비록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해도 따뜻한 이불을 서리서리 넣었다가 구뷔구뷔 펴지는 못할 것이다.
실연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 우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비애를 알지 못한다. 삼경의 겨울밤에 황진이의 시조를 읊조리고 필자가 겨울에 자주 듣는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 (Der Leiermann)’을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로 듣는다. ‘겨울 나그네’와 ‘동짓달 기나긴 밤’, 들리는 가락도 아름답지만, 귀에 들리지 않는 시조의 운율 또한, 그 얼마나 감미로운가.
며칠 남지 않은 동짓날에는 황진이의 애잔한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친 선율을 겨울나그네 속 ‘거리의 악사’가 되어 보리수 아래서 손풍금 연주를 해볼까 한다. 누가 텅 빈 내 마음의 접시에 동전 한 잎 던져주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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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대상)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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