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자코메티
-고요의 울림과 고독의 전율을 창조하다
미술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니 의아심을 가진 분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어쩌다 이런저런 잡문에 가까운 글을 써 왔던 나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또한 일천한 실력으로 시심도 시력도 없이 글쟁이의 최 하단 말석에 앉아 시답지 않은 시를 써온, 군에 갓 입대한 훈련병 같은 시졸(詩卒)이니 말이다.
어느 해 시골에서 만난 천문학을 전공한 후배와 유난히 맑고 밝은 가을 밤하늘을 쳐다보며 평상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달과 별 등을 볼 때 왜 빛이 나고 지구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고 왜 별똥별이 떨어지는 등의 이유를 알고 보느냐고 물었다.
참 이상하다. 내가 가을밤의 하늘을 보면서 윤동주의 ‘서시’를 떠 올리며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면서 별을 노래하면 되는 것이고, 이백처럼 월하독작(月下獨酌) 하며 잔 들어 달을 맞이하면서 친구 없이도 한 동이 술을 마시고, 어느 스님의 시구처럼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아 별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를 술동이 삼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학문적으로 천문학적으로 알아야 하겠는가.
사실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과 일방적 두뇌 집중을 강요하다시피 한 교육이 정신적 불구자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후배처럼 전공 이외의 분야의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을 전혀 모르는 필리스틴(Philistine)이 스스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적편중과 좁은 시야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지만 난, 가끔 서울과 근교의 미술관이나 건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럴 때 나의 시각과 육감으로 때론 공감각을 느끼며 아름다움과 놀라운 영감을 얻게 되며 지평 융합의 자기실현을 하게 된다.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난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다. 그래도 堂狗風月이라 하지 않았던가. 꽤나 많은 세월을 관심 갖다 보니. 눈으로 그리고, 귀로 보고, 몸으로 감상하며, 가슴으로 느끼며 감동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난 가끔 내가 보아서, 들어서, 읽어서 그 순간에 느끼는 희열 등을 형상화 시키며, 충동이나 잠시의 현기증에 주저앉은 때도 있다. 흔히 말한‘스탕달 신드롬’은 아닐지언정 소마 미술관 <테이트 전>에서 로댕의 ‘키스’와 서산의‘백제의 미소’때론 동구 밖에 아무렇게나 세워진‘미륵불’이나‘장승 앞에서 얼빠진 모습으로 한 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특히 조각에 대해‘형태맹(形態盲 form blind)’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람 미술관의 자코메티 전시회를 갔다. 언어로 빚어진 것이 시라고 할 때 말로써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가 아닌, 조각이나, 건축, 공예 등으로 표현된 조형의 언어가 있음도 알았다. 특히 커다란 돌이나 나무, 석고 등을 깎아 그 안에 숨겨진 형상을 찾아 조각한다는 것은 필요한 언어만 남기고 버리면서 겪는 시인의 고통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한남동 리움 미술관의‘마망’을 조각한 루이스 부르주아가 말했듯이 “내가 할 말을 조각으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코메티에게도 조각은 언어였고 시였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인이 괴로워하는 사회는 병들어 있다.”라고 했듯이 시대를 아파하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듯 자코메티도 그의 작품을 통해 1.2차 세계대전의 폭력성과 파괴성, 그리고 잔혹성 등을 보면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괴로워하고 당 시대를 괴로워하며 개인의 실존에 관함 물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를 고민하는 가운데 실존의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어 작품으로 형상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자기의 타자가 되어 그 타자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면서 실존이라는 명제 앞에 서서 작품 활동을 했을 것이다. 신도 운명도 그 어떠한 매개자가 아닌 오직 자신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신을 부정했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세계의 파도를 만난 그 뒤에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고 했다
9.11 테러나, 세월호 참사 등을 보면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 앞에 인간이란 그 어떤 희망과 구제받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난 던져진(被投) 존재라는 인식하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이끌렸고 그래서 실존주의 조각가인 자코메티 전시회를 가고 싶었다.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역사에서 근대는 매우 중요하다.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탈근대(post-modern) 시기에 인류의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헤겔이 설파한 변증법의 논리대로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 즉 정반합의 방식으로 세계가 변화해간다고 한다. 정반합의 합은 다시 정반합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자본주의, 과학 그리고 이성 등이 쇠사슬처럼 발전해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반성하면서 나온 게 바로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문학과 각 예술 분야에 걸쳐 침투되고 투영되는데 그중에 대표적 철학자는 니체로부터 케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이 아닌가 싶다. 물론 철학자 중에서도 약간의 다른 면모를 보이는데 케에르케고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고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절대자를 인정하지만, 이때 절대자의 개념은 종교적 신의 개념과는 다르다.
실존주의가 태어난 배경은 1.2차 세계대전에서의 대량학살에서 오는 불안, 절망, 파괴와 자본주의 발달 및 산업화에서 오는 물질 만능주의 등 그리고 기계문명과 발달로 인간이 소모되고, 과학 지상주의에서 잉태된 비인간화와 대중화에서 오는 개성의 파괴 등 파편화된 인간의 소외감에서 ‘나는 누구인가?’,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배경에서 도태된 것이 실존주의가 아닌가 한다. 관념과 절대적, 보편적인 실존이 아닌 오직 개인, 개체적이고 획일적 사고를 배격하면서 이념이나 사상을 배척한 나의 삶이 바로 실존일 것이다.
실존은 현실적이며 결코 상대화할 수 없는 개인적이다.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메시지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의 케에르케고르는‘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했다. 즉 선택, 주체성 등을 신을 통한 그 안에서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신론적 사르트르는 실존과 본질, 자유, 참여 문학론 등에서 신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자유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 것이다. 철저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는 무엇보다 문학의 사회적 참여, 앙가주망을 강조하면서 카타르시스에 머물지 말라고 했던 그가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고 실존 의식을 말하며 극찬 했던 인물이다.
- 실존, 진정한 지구를 걷다.
- 걸어가는 사람 (walking man), 1960
말 그대로 명상의 방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엄숙함에 앞서 철사 가닥 같이 삐쩍 마르고, 거센 입김으로도 금방 부러질 것 같은 고갱이의 키 큰 사람이 걷고 있었다. 아니 존재의 본질이 걷고 있었다. 삶의 얽매임과 끈으로부터의 자유를 직시하고 벗어나려는 듯, 눈빛은 유독 빛나고 마른 갈대 같은 신체에 비해 발은 두꺼웠다. 보는 순간 피골이 상접한‘석가의 고행상과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의 그뤼네 발트 작품‘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튀어나온 갈비뼈, 그리고 심한 고통과 비극적 상황 묘사 등에서 육체의 살과 수분을 증발시켜 얻은 자코메티의 실존적 작품에서 동일성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시아 최초로 석고 원본이 공개되고, 몇천억이라는 거액보다는 자코메티 재단의 대표 격인 작품을 한국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사진 촬영도 할 수 있게 허락해준 것에 우선 놀랐다. 예전에 해외 유명 가수들이 분단국가라는 이유로 공연 하지 않았는데 전시 중 북한의 핵 위협에 정세가 시끌벅적 함에도 고민과 갈등 끝에 기꺼이 전시 해준 것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서 분단의 아픔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자코메티-
그렇다. 지향점이, 종착점이 어디일지 알 수 없지만 걸어야 한다. 걷기 위해서 일어서야만 하고 발을 내디뎌야 한다. 가늘고 길게 늘어진, 앙상한 뼈대만 남은 신체,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느꼈던 불안, 공포, 우울함, 그리고 부조리에서 과연 나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에 대한 회의와 관심을, 폐허가 된 문명 앞에 황폐해지고 비인간화된 실존의 존재를 추구하고자 했던 자코메티, 텅 빈 곳을 존재의 존재로 가득 채우면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앙드레 브르통 그리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 등을 만나면서 가늘고 긴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거칠고 바늘 같은 인체, 자코메티가 바라본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전쟁의 참혹한 현상을 목격한 후 망연자실한 허무와 고독을 응시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왜 비우고, 덜어내고, 깎아내고, 다듬어서 저런 작품을 완성했을까. 아니 ‘비움’의 철학에 집착했을까
중국의 소동파는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대나무가 내 속에서 자라나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가장 완벽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라고 할 때 자코메티도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작품 안에 존재하고 이해되고 싶지는 않았을까. 비우면 채워지는 단순한 진리를 터득한 자코메티, 불교에서도‘자기 없앰’과 ‘자기 비움’을 강조하고 유교에서도 ‘사(私)’ 즉 사사로움을 잊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예수도 ‘누구든 나를 따라서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듯이 집착과 증오와 자기중심적 사고가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될 때 오히려 개체적 자유와 실존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내려놓고 놓아버리는 ‘放下著’이나 비워야만 빛이 들어올 수 있는 ‘虛室生白’의 의미를 無’와 ‘空’으로 조각을 한 자코메티.
그래서 그의 작품 기법은 완성된 작품에서 떼어 내고 걷어내는 조각 기법으로 또 다른 완성작을 탄생하게 했다. 장 주네가 쓴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 이런 글이 나온다. “걷고 있는 사람, 실처럼 가느다랗다, 구부러진 그의 발, 그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절대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멈춰서도 아니 될 것이다. 땅, 아니 지구 위를 걸어야 하기에. 난, 자코메티 전을 보고 난 뒤부터는 사람의 얼굴을 볼 때는 살과 수분의 부피를 없애고 보게 되었다
- 걷고 있는 유능한 영혼들
<광장Ⅱ>. 1947~194848. 24×63.5×43cm. 개인소장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넋 나간 유령이 되어
한 알 한 알 감정을 떨어뜨리며
미라가 미로를 헤매고 있다.
무게와 부피와
육신의 껍데기마저 벗어놓고
기름기 빠진 관절로
작대기 되어 서 있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발의 무게는 덜어내지 않고
한 줄기 고독을 뛰어넘어
유능한 영혼들이 걷고 있다.
_졸시
무엇이, 얼마만큼의 무게로 저들의 영육에 올가미를 씌웠을까. 감정은 가뭄의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고 매몰되어 유령처럼 배회하듯 엇갈린 시선으로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이정표도 없이 걷는 듯한 저들의 표정엔 말 이음표 하나 없고 휘청 걸음엔 침묵과 고독과 절망이 실려 있다. 덜어내고, 비우고, 깎아 낸, 그래서 미라처럼 되어버린 저들의 모습 앞에 낯설지만, 때론 방향 잃고 사막 한가운데 서서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앙상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몇백 년 만에 출토된 미라의 앙상한 몰골들. 불안과 불합리한 세계의 광장에 던져진 절망적 한계의 부조리. 무엇이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억압을 주는지 얼어붙은 차렷 자세 취하고 있는 여성, 그 연약하고 가벼운 비움의 철학에서 자코메티는 존재의 본질을 찾았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연약함, 가벼움이다.
<광장>의 작품을 보자마자 떠 오른 작품이 추사의 <세한도>이다. 찰나적이었다. 소나무와 소박한 흙집 등 주변의 기름기를 뺀 갈필의 붓 터치에서 오는 절제의 극치미 때문일까. 그리고 동양화의 ‘난’,과‘대나무 그림이 오버랩 되었다. 화선지를 꽉 매운 서양화보다는 텅 빈 여백에 필요치 않은 것은 과감히 생략하고 난 잎 몇 개 툭툭 치는 무념무상의 동양화에서 자코메티의 조각 기법이 보였다. 자코메티는 붙이고 덧붙이면서 형태를 조각하는 게 아니라 덜어내고 걷어내면서 형태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것 외에 나머지는 생략하는 선종의 기법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동안 모델이 되어준 일본 철학자 이사쿠 야나이하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천사와 공기의 막, ‘앵프라맹스(inframince)’
<Man and Woman>, Bronze, Muse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1928-1929.
가까운 부모와 자식, 또는 사랑하는 연인, 친구들 사이에도 뭔지 모르게 어떤 막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타자가 나일 수 없고 내가 타자일 수 없는. 우린 그 관계의 막을 잊고 하나가 되길 원한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를 얇게 가로막고 있는 것, 그래서 슬픔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앵프라맹스(inframince)다. 이 말은 기성 제품인 소변기를 설치해 놓고 ‘샘(Fountain, 1915)이라고 이름을 붙인 전위예술가 마르셀 뒤샹이 만든 개념인데 혹시 한겨울 화장실 소변기에서 그는 미지근한 온기를 느껴서 이 개념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한다.
공기와 천사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차이가 여자의 사랑과 남자의 사랑 사이에 존재하듯이 이 작품에서도 남자와 여성 사이의 긴장감 속에 어딘지 모르게 하나가 될 수 없는 얇은 막과 거리감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자코메티가 여자들과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 같다. 화살 같은 남성과 방어적인 여성, 실존주의 일본인 철학자 이사쿠 야나이하라가 그의 부인 아네트와의 불륜 사실을 고백했을 때 자코메티는 아내가 기뻐하니 좋다고 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는 춘향이의 不更二父의 정절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가들의 독특한 개성과 자코메티의 여성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도 결코 순탄치 아니했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왼쪽이 남자이고 오른쪽이 여자이다. 그리고 남자는 다소 공격적인 반면 여성의 자세는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면서 뒤로 물러서려는 듯 방어적인 자세로 보인다. 또한 몸체는 움푹 파이고 텅 비어버린 모습이 그의 작품 ‘숟가락 여인’을 닮기도 했다.
자코메티는 작품 활동 중에 자기 모델 및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주변의 많은 여성과 편력이 있었다. 특히 예쁜 그의 아네트와 결혼 후에도 무려 40여 년의 차이가 나는 술집 출신의 캐롤린에게 열정과 사랑을 쏟았다. 아내를 두고 접대부 출신의 여성과 사랑에 빠진 그를 두고 예술세계의 거창함보다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냉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의 본질적인 사랑의 질문에 앞서 선한 불륜이라고는 할 수 없을까. 캐롤린은 자코메티에게 예술의 영감과 꿈을 심어주었을 것이고 자코메티의 미래였을 것이다.
쉬잔 발라동, 화가 르누아르의 연인이었고 작곡가 에릭 사티의 대표곡인 <난 널 원해>라는 곡도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뒤 사랑에 빠져 만든 곡이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계의 알마 말러 또한 발라동 못지않게 많은 남자의 마음을 빼앗고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염문,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는 그녀를 위해 <교향곡 8번>을 바쳤다. 무엇보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대표작 <바람의 신부>의 여인이 바로 알마 말러이다. 이렇듯 예술가들의 사고와 행동은 구속보다는 자유를, 얽매임보다는 풀어짐의 정신 예술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그리고 영감을 주었던 여인들 또한 주체적이고 개체적으로 진정한 자아의 세계를 찾아 헤매는 여인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캐롤린도 눈과 손끝과 입술에 자코메티의 사랑이 스며든 여인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둘은 하나가 되고 또 둘의 전부가 되었을 것이다.
- 境生象外
<로타르 좌상>(석고 원본·1965∼1966).
자코메티는 사르트르와 만나면서 동양의 사상에 대해 많은 얘기를 주고받는다. 특히 그의 모델이면서 부인 아네트와 불륜관계였던 이사쿠 야나이하리를 일본인 철학자를 만나면서 동양사상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면서 보이는 세계보다는 그 이면의 감춰진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
자코메티가 생의 최후를 맞이하기 전 생애를 통한 깨달음과 통찰력의 작품인‘로타르 좌상’, 이 작품을 보자마자 에포케(epoche)에 빠지고 만다. 왜냐면 우리나라 국보인‘반가사유상’과 닮은 듯 하면서 서로 다른 좌상이고 뿜어져 나온 기에서 동양적인 사상이 흐르는 것 같지만 나만의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어서이다. 한편 ‘반가사유상’과 ‘로타르 좌상’은 역사적, 시대적, 태생적으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초월성의 본질은 같지 않을까.
그리지 못한 것은 눈으로도 보지 못한다고 했듯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감상을 해야 할지 몰라 순간의 판단력이 잠시 멈췄던 것이다.‘境生象外’라고 했다. 진정한 뜻은 보이는 외형 너머의 보이지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느 신앙인이 구도의 길 끝에 해탈한 경지에서 얻는 듯한 최고의 걸작이다. 자신의 조각 작품에 묻혀 존재하고자 했던 그는 사진작가 출신의 루마니아계 유대인 엘리 로타르를 400여 회에 걸쳐 모델로 세운다. 고통과 열반의 흔적이 남아있는 미소의 반가사유상에서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실존을 잘 표현했다고 했다.‘로타르 좌상’에서도 미소가 아닌 그의 강렬한 눈빛과 거기서 묻어난 심오한 성찰의 형상에서 실존을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사고의 비약일까. 그리고 권진규의 무언의 메시지를 통한‘자소상’과 무언가를 갈구하는 시선에 담긴 실존의 ‘로타르 좌상’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와서 한동안 머물게 한 작품이 ‘걷는 사람’과 바로 ‘로타르 좌상’이었다. 자코메티는 경제적 사회적 타락의 길을 걷다 감옥까지 다녀와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로타르에게서 더욱 더 인간의 근원적 물음과 본질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텅 빈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서 개인의 실존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두 번은 없다.’의 시구가 생각이 났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중략)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분별하기 힘든 투명한 두 개의 물방울도 서로 다른 개체다. 집과 회사와 사회 등의 집단에서 개성과 주관은 매몰되고 집단에 함몰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두 개의 물방울처럼 개인의 인성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이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나와 닮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란 존재는 ‘타인’으로 대치될 수 없는 개체적이고 주체적인 실존을 강조한 점에서 자코메티의 실존의식과 닮은 점을 보게 되었다.
- 예술, 어떠한 권력을 넘어서는 힘.
난 미술 전시회 때는 혼자 가는 버릇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지만, 방해받지 않은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어서이다. 진정한 관람은 혼자 즐기는 법이다. 한가람 미술관의 자코메티 전시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관람객 사이에 나만이 멈춰 서는 곳과 지나쳐야 할 곳을 오직 나의 선택에 의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 겨울 바닷가의 수분 빠진 갈대 같은 가느다란 철재, 석고 작품들이 오히려 설렘과 감동으로 다가온 전시회였다.
실존, 그리고 자코메티를 알려고 하는 문이 열릴 때 그와 그의 조각 또한 속 깊이 간직한 속살을 나에게 내보이는 것 같았다. 시인들이 시를 쓰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시를 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누군가를 비워내야만 그 자리에 시가 들어오는 것이다. 주체적이고 개체적인 나다움으로 살기 위해서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태어나게 하는 즉 자유로움의 또 다른 나의 탄생을 위해서 나를 비우고 그 빈 자리에 수많은 새로운 나로 살기 위한 ‘비움’의 역설을 자코메티의 작품을 통한 시간과 눈품과, 발품이 아깝지 않은 시간을 가졌다.
어느 전시회에서도 느끼는 바이지만, 너무 전문적이고 지식을 과시하는 듯한 도슨트의 설명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있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몰수당한 느낌일 때가 있다. 유명작가라는 세속적 명예를 들먹일 땐 듣는 이로 하여금 시야와 사고의 범위를 제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술작품, 즉 조각도 오직 감상자의 몫이 아닐까 한다. 전문가가 아니고 지식이 없다고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겠는가. 소위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 그들만의 메이저리그로 착각하고 있는 오만과 헤게모니의 벙커에서 여전히 헤매지 말고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자코메티의 앙상하고 삐쩍 마른, 기다란 인체 조각들은 코트디부아르의 단(Dan)부족이 사용하는 여체 모양의 주걱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시기에는 많은 예술가가 아프리카, 남태평양 아시아 식민 지배 받은 원시 부족들의 예술품의 티 없는 순수에서 영감과 힌트를 얻는 시기였다. 일본의 도자기 포장지였던 우키요에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듯이 예술가들은 시대와 대륙, 시공간을 초월해서 영감을 주고받으며 또 다른 새로운 유파, 흐름을 형성하는 것 같다.
그는 1966년 1월 11일 숨을 거둘 때까지 당대 사람들이 겪는 고독, 불안, 공포를 형상화했으며 인간의 실존을 추구했고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은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걸어가는 사람 (walking man), 1960
'나의 雜論直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통 가락에 흐르는 恨과 멋 -심호(心湖) 이동주론 (0) | 2023.07.20 |
---|---|
시 모음, <담장> (0) | 2023.07.19 |
홍영수 시인의 문학 강연 /멍 때린 생각에 따귀를 때려라 (0) | 2023.05.25 |
홍영수의 동화/동그라미 (0) | 2023.04.06 |
에곤 실레 (0) | 2022.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