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땡볕 아래서도 논틀밭틀을 오가며 묵정밭을 일구며 씨앗을 뿌리는 아내, 손으로 흩뿌리는 것은 가족을 위한 행복의 씨앗들이다. 그리고 발아한 농작물에 맺힌 알곡에서는 먼 객지에 나간 자식들의 안녕과 건강을 조심스럽게 따낸다. 그 순간 머금은 미소에는 행복의 미소가 슬며시 입가에 맺힌다.
긴 긴 가뭄에도 희망의 빗물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논밭에 물을 주고, 어둑새벽 빗소리가 기다림에 지친 귀속의 달팽이관을 울릴 때면 장화를 신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곧바로 논밭으로 달려갔다. 이러한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지켜 온 오랜 세월, 사랑과 존경으로 그리고 부족하지만, 옆지기로서 늘 함께 행복의 밭고랑과 논두렁을 일궜다.
아내는 농촌에서 시든 농작물의 잎사귀와 누렇게 색바랜 이삭 같은 힘든 길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오직 인내와 견딤의 가위질로 행복의 농작물을 알뜰살뜰 가꿔왔다. 그때 실하게 맺힌 열매는 행복의 씨앗으로 다시금 싹을 틔웠다. 그렇다. 힘든 농사일에 어찌 불편한 심기와 짜증스러운 날들이 없겠는가? 그래도 행복의 열매와 잘 익은 곡식들을 위해서는 당연히 참고 견뎌야 했다. 더구나 힘든 농사 짓기에도 내색을 별로 하지 않은 아내를 위해서는 남편인 내가 먼저 위로하고 격려해야 했다.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가깝고, 먼 논밭에서 작물을 일구는 아내의 모습에서 가끔 두 딸의 모습을 엿볼 때가 있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두 딸의 엄마로서 그리고 시댁과 친정의 많은 가족들과의 관계망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주변인들을 챙기며 주어진 일에 열심히 노력하는 아내, 그러한 아내의 삶에 대한 자세에서 육순을 넘기며 살아온 남편으로서 차라리 그 어떤 신앙심마저 갖게 되었다. 그 알 수 없는 신앙심으로 올리는 기도에는 행복의 두 손이 곱고 경건하게 모아졌다.
살며, 살아오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아내의 맘속 탯자리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객지에 사는 두 딸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서는 논밭에 씨앗을 뿌리듯 행복의 씨앗을 뿌리고 잘 여문 알곡을 위해 호미와 같은 농기구로 헐거운 곳은 북돋우고, 무너진 곳은 다시 쌓아 올리듯, 햇귀가 솟아오를 때부터 산그리메가 밭두렁에 가만가만 내려올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맘속 깊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아내는 구멍 숭숭 뚫린 무릎에서 세월의 거친 숨소리인 듯 뚝 뚝 소리가 나지만, 두 손 짚고 일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터로 향한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아픔과 고통은 허공에 매달아 놓고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마저 잃어가며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과 마음속에 새겨넣는다는 것, 희생정신이란 이런 것일까?
비록 풍족한 삶은 아니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아내. 무엇보다 남들과 비교해서 스스로 비참함을 겪는 것이 아닌, 화려함으로 분장한 겉치레의 외투보다는 꾸미지 않은 순수함의 절제와 인내의 속옷을 입고 평생토록 벗을 수 없는 ‘엄마’‘아내’라는 단어를 꼭 껴입고 지금도 논밭길로 걸어가고 있다.
땅끝, 시골 농촌의 삶이란 모든 일들이 힘들고 때론, 불편하지만 그래도 아내는 그러한 결핍을 고상함으로 승화시키고, 아름답고 멋진 숭고함을 동경하면서 살아가는 영혼의 소유자이다. 그렇게 맑고 고운 혼의 발소리와 기침 소리를 듣고 자라는 농작물에는 행복이 피어오르고 논두렁과 밭두렁에서 자란 알곡은 잘 여물 수밖에 없다. 행복의 열매 또한,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2024 해남 행복 에세이’공모전 수상작품집『행복은 가까이』, 도서출판 북산.
'나의 글 外'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 제4회 한탄강문학상 수상자 (1) | 2024.10.05 |
---|---|
안수환 시선집 (0) | 2024.09.05 |
엄마! 보고 싶다 / 홍영수 (0) | 2024.06.21 |
대흥사 숲길 외 1편 / 홍영수 (0) | 2024.06.21 |
울산광역매일신문 '여여/구정혜' (1) | 2024.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