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숲길
숲길에 들어서면
달짝지근한 숲 향, 귀 고막을 울리는 새소리에
취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
나를 버리고 숲의 숲이 되어야
비로소 참나로 깨어나게 하는 숲
아홉 굽이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휘어잡고서
바람은 일필휘지로 골짜기를 가르고
명지바람에 다디단 숲 냄새가
발묵 스르륵 나뭇가지로 번질 무렵
이파리 사이로 보인
구름 화선지 가녘으로 항적운이 스민다.
걸음걸음 위에 화두처럼 툭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깨닫지 못한 심연에 물음표가 되어
구새 먹은 얼혼을 깨우고
영육에 슬어놓았던 먼지 알갱이들
개울물에 씻어 보내며
주렁주렁 매단 산새들의 음표 데려다 놓고
솜털 구름 베개 삼아 실카장 눕는다.
깜박 든 풋잠, 깨어보니
일지암의 다향이
코끝을 스친다.
초간정草澗亭에서*
낮추자, 더는 낮출 수 없을 때까지
공손함 없이 어찌 들어설 수 있겠는가
고개를 숙여야 우러러볼 수 있는 곳
기왓골에 흘러내린 초간의 문장이
댓돌 위로 똑, 똑, 똑 떨어질 때
계자난간에 스친 솔바람을 데려온, 붓끝은
대청마루 바닥에 일필휘지로 가른다.
운필의 묵향에 함뿍 젖은 문맥들이
구멍 뚫린 시대를 꿰매면서
흐트러진 정신의 매무새를 다잡으며
맑은 금곡천 물고기 비늘에서 반짝인다.
용문산 숲 향을 온몸에 휘두른, 원림園林은
비질한 마당에 내려앉는 달빛 몇 장에
풀 내음 물 내음 다문다문 주워 모아
문자 향으로 사르면서
기스락에 물든 노을 한 잔 마신다.
석조헌夕釣軒에 들어선 초간은
나울치는 물녘에서
대동大東의 은빛 혼을 낚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초간정사' 2022/09/17. 사진/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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