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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고 우린 시내 자그마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불과 몇 잔 마시는 순간, 그 순간을 기억한다. 눈을 감아도 귀를 닫아도, 오감을 잠그고 덮어도 소리가 들리는 순간을. 술 마시는 밤의 어둠이 비록 빛과 사물의 형태를 감출지라도 산 넘고 바다 건너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을 울리는 벨 소리는 막을 수 없다. 그렇다. 그동안의 침묵은 이 땅에서 울려야 할 또 하나의 울림을 이미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념의 경계도, 거리의 원근도, 사상의 벽도 그 어떤 장애물도 소리를 잡아놓을 수 없다. 그래서 들었다, 몇 평 되는 호프집에서. 우린 마셨다. 돌아버린 사람처럼 온몸 부르르 떨며, 그 순간에 들려오는 우주의 벨 소리를 귀로 마셨다. 얼마나 큰 벨 소리였기에 놀란 달팽이관도 처음인 듯이 소리를 들었다. 모든 사람을 울리는 위대함의 황홀함을.
함께 자리한 이문회우의 동료들, 그들과의 만남은 백아와 종자기와 같은 문우들이다. 그러한 지음들이기에 술집에서 만나면 취하고, 커피 한 잔에도 취한다. 일상에서의 처절한 고뇌와 번뇌와 정적을 안고서도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한 줄기 은빛 햇살을 피어오르게 하는 지음지기들이다. 여기서 취함은 술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분야, 그리고 작금의 돌아가는 세태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 등에서 오는 잔인한 고통의 행복에 취함을 말한다. 보들레르의 산문시 한편이 떠오른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의식이 있고, 의식이 없고를 떠나 무감각한 사람이 아닌 이상 과거와 현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온갖 험담과 불의와 개념 없는 시기와 질투 등이 흐르는 현실을 목도할 때가 있다. 이러한 사회를 바라보는 문우들은 그들로 인해 고통과 절규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는 없다. 그래서 번민과 고뇌와 고통의 아픔으로 술에 취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예술의 언어는 시대적 아픔을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 시대가 삶의 언어를, 시대의 아픈 상처를 파고드는 언어를 묶어놓고 채찍질한다 한들, 뾰쪽뾰쪽 튀어나온 언어의 모가지를 불도저로 밀어붙인다 한들, 끼리끼리 패턴 짓기를 한다 한들, 결코 문학과 예술의 언어는 불온의 솟구침으로 솟아오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언어의 샘물이 메말라 흐르지 않을 때 타는 목마름을 우린 느낀다. 의식의 유리창에 성에가 끼는 엄동설한의 한파를 느끼고, 마중물을 부어도 한 방울의 샘물도 나오지 않은 갈증을 느낀다. 그렇지만, 시대를 아파하는 지성의 언어와 글과 작품들은 저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 비록, 샘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시대의 그들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해야 할 일이라면, 한탄에 젖지 말고, 원망도 품지 말자. 먼저 솟구치고 솟아오르자, 목마른 언어의 깊은 심연과 지층으로부터.
가끔 베란다 구석진 곳에 있는 세탁기를 생각한다. 때 묻어 얼룩지고, 오염으로 더럽혀져 지저분한 옷가지들을 깨끗하게 해주는 세제, 그리고 어부들의 찢긴 그물을 꿰매어 보망하는 바늘, 이처럼 이곳저곳 얼룩진 언어와 갈래갈래 찢어진 삶의 옷가지들을 정화하고 봉합하는 언어가 바로 곰팡이 핀 언어가 아니라 싱싱한 문학의 언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문학을 한다는 것은, 불확실성에 맞선 불온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중동지역의 이스라엘과 그 이웃 국가들, 몇 년 동안 지속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소식들을. 비단 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눈앞의 현실을 생각하며 이날 밤 몇 잔의 술임에도 도도히 흐르는 호모 로퀜스Homo loquens)인 한강 언어의 강물을 마신 듯 취했고, 입으로 마시는 술이 아닌 귀로 마셨다. 귀로 마시니 귀가 웃고, 눈으로 마시니 눈물이 났다. 커다랗게 들리는 벨의 울림 때문에.
시간이 흘러서 작별하고 싶지 않은 문우들과 헤어지려고 할 때였다. 먼발치에서 어떤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나타나 순간 사라지는 소년, 누구였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집에 돌아와 서랍 속에 넣어둔 저녁을 다시 꺼내 보았다. 그리고 흰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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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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