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천민이요, 눈은 양반’이라는 말처럼 이중적 신분 구조에 처했던 그들(妓生), 조선 시대 여성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예능적인 면은 평가 절하되고 娼妓(창기)와 동일 개념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시서화에 능한 예술인으로서 사회적 자리매김을 받아야 마땅한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채 왜곡된 성(性) 상품으로 이 시대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조선의 로는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그리고 성천의 김부용을 꼽고 있으나 ‘홍랑(洪娘)’ 또한 이들에 비해 詩妓로서는 빠질 수 없는 기녀가 아닌가 한다. 그녀들의 예술적 행위는 지금도 무형 문화재로서 자리하고 있으며, 당시 전문 예인인 만능 엔터네이너로서의 그들을 일반적 호칭인‘기생妓生’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