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지리산 둘레길을 천천히 걷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비옷을 꺼내 갈아입고, 늦가을 빗소리를 동무 삼아 속세에서 말라버리고 잠든 언어를 깨우고 땟자국 낀 숨결을 빗물로 씻으면서 소요음영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잠시 숨을 고르면서 비에 젖은 낙엽과 아직도 가지에 매달린 잎들의 향기에 젖는 순간 눈앞에 거미줄이 보였다. 거미줄이 아니라 빗방울이 모여 꽃을 피우는 듯한, 나뭇가지에 걸친 수백 개의 물방울 꽃이었다. 그리고 치솟는 욕망을 내려놓으니 숲 향이 다가왔다. 그리고 목표했던 지점까지 걷고, 다시금 차를 타고 되돌아오는 길에 들린 곳이 실상사였다. 평지사찰로써 구산선문의 탯자리다. 그동안 수 없는 답사의 경험을 살려 실상사에 대한 다양한 참고자료와 책들을 통해 많은 준비를 했기에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