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지리산 둘레길을 천천히 걷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비옷을 꺼내 갈아입고, 늦가을 빗소리를 동무 삼아 속세에서 말라버리고 잠든 언어를 깨우고 땟자국 낀 숨결을 빗물로 씻으면서 소요음영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잠시 숨을 고르면서 비에 젖은 낙엽과 아직도 가지에 매달린 잎들의 향기에 젖는 순간 눈앞에 거미줄이 보였다. 거미줄이 아니라 빗방울이 모여 꽃을 피우는 듯한, 나뭇가지에 걸친 수백 개의 물방울 꽃이었다. 그리고 치솟는 욕망을 내려놓으니 숲 향이 다가왔다.
그리고 목표했던 지점까지 걷고, 다시금 차를 타고 되돌아오는 길에 들린 곳이 실상사였다. 평지사찰로써 구산선문의 탯자리다. 그동안 수 없는 답사의 경험을 살려 실상사에 대한 다양한 참고자료와 책들을 통해 많은 준비를 했기에 차분하고 뜻있게 둘러볼 수 있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글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러운 나무를 양쪽에 세우고 위쪽에는 약간 넓은 널빤지로 가로질러 세워졌는데 그 널빤지에는 “지리산 실상사”, 왼편에 세워진 세로의 기둥에는 “인드라망“ 생명 공동체”, 그리고 오른편 세로로 세워진 기둥에는 “구산선문 최초 가람”이라고 되어있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글이 바로 “인드라망”이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에 둘레길에서 만나 한참을 서성이며 보았던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형용키 어려우면서 순간 멍한 느낌이 들어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거미줄의 물방울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이곳 실상에서 다시 한번 되뇌며 상념에 잠겼다. 상당한 시간 동안.
“인다라망(因陀羅網)”, 부처가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라 한다. 이 그물망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물코와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말한다. 현대에 와서 논의된 초끈이론의 파동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 전체 거미줄의 물방울 형상이 비추고 전체의 물방울에 하나하나의 물방울의 형상이 비추듯,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조직망도 이같이 전체가 하나를, 하나가 전체를 비추면서 서로의 내부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는 관계의 網이다. 불교의 연기설에서 보듯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此生故彼生)와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거미줄 코에 맺힌 각각의 투명한 빗방울은 우주 삼라만상이 투영되어 있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론적 관계로 얘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인간의 그물망 코에 각자의 象이 맺혀 서로에게 투영된 연기론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노자(老子)도 하늘과 땅에도 그물망이 드리워져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천라지망天羅地網).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이지만 결코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격의 없이 더불어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생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같이 우린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수 없는 연결고리로 이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 연결고리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 주고받는다. 그것은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이며, 인연의 그물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 형제, 학교의 선후배, 사회에서의 위계적, 수평적 관계, 그리고 결혼 후의 혈연적 관계 등등, 이러한 고리에 연결되어진 거미줄 같은 망으로 직조된 인간사회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나는 너를 머금고 너는 나를 머금고 서로가 스며들어 의미 있는 망의 구슬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요즘은 ‘느림’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바쁜 직장과 하는 일들의 울타리 안에서 사육되고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둘레길, 그 길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고 느림의 쉼터이다. 분주한 일상에서도 한 번쯤 나를 뒤돌아볼 수 있는 둘레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반추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갈망하는 사람한테만 다가와 주어진 몫이 된다. 둘레길에서 주운“거미줄에 맺힌 물방울”과 “실상사에서 만난 인드라망”, 화두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둘레길에서 무심코 다가와 줍는.
바쁜 현실이라는 날카롭고 삭막한 철조망의 그물망 앞에서 절대로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비록 불모지 같은 삶의 길일지라도 한 줌의 단비를 갈망해서 푸르디푸른 희망의 싹을 틔우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모든 것은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자, 이제 둘레길에서 돌아왔다. 다시 일상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우린 결코 중중무진重重無盡 연기의 세계로 맺어진 관계의 망을 잊지 말자. 그리고 연기적 사유로 세상을 바라보자.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과 “실상사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내가 코가 꿰이어 있음을 자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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