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음악, 그 어떤 예술이든 우리의 삶과 뗄 수 없는 연결고리로 얽혀 있다. 숲속의 새들과 들녘의 농작물과 흐르는 시냇물, 경로당의 어르신들과 유치원의 어린이 등은 결코 누구에게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현실 속에서 함께 느끼는 감정과 정서 등이 부딪치면서 때론, 공감하고 공유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 낭송 또한 시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 가슴에 와닿은 그 무엇 속에서 자기만의 느끼는 감정과 감성으로 낭송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낭송할 시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감상하려면 말러의 시를 읽어야 하고, 판소리를 이해하려면 민초들의 굴곡진 삶의 애환과 고뇌와 통증 등에 공감해야 한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의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그 시의 세계에 녹아들어 흡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과 공부로 태어난 시 낭송이 때론, 낭송가를 아프고 힘들게 하지만, 그것은 낭송이란 장르가 낭송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손택수 시인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의 낭송을 들으면 갑자기 아버지의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청각적인 요소가 시각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 ‘등짝’의 시커먼 ‘지게 자국’을 보면서 왜 아버지가 목욕탕을 함께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식들을 위한 아버지를 떠 올리며 그 등에서 해와 달을 짊어진 것보다 더한 ‘자식’을 짊어져 시커멓게 멍든 자국을 떠 올린다. 이처럼 낭송이라는 선율이 청자에게 시각화되어 전달될 때 관객은 스스로 전율한다. 그러면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같이 관객 중에 시 낭송을 들으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낭송이 배태시킨 심혼의 눈물임이 분명하다. 그 눈물이 하얀 옷깃에 떨어질 때, 그리고 옷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볼 때, 낭송가는 낭송 예술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가 되면서 또한, 시 낭송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시 낭송은 울울한 가슴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한 잔의 포도주이고 때론, 타는 목마름을 해소케 하는 톡 쏘는 탄산음료이기도 하다. 이 같은 느낌을 받으려 한다면, 우선 관객은 훌륭한 무대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극한 공감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불성실한 무대에는 준엄한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명성이라는 하찮은 허울에 모든 것을 팔아버리고 고개를 조아리는 비굴한 저자세로 그저 이름값에만 매달려서는 아니 된다.
문학, 예술은 세계를 재창조해야 분야다. 틀에 박힌 매너리즘, 그리고 기존 질서와 분위기에 편승하고 안주해서는 안 된다. 비록 대중에게 당장 소외감을 느끼고 등 돌리는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 고통은 영광의 고통이고 보다 나은 미래의 버팀목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 하는 듯한 통조림이나 인스턴트 식품 같은 예술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생산품이다. 그래서 보다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움의 낭송을 지향한다면, 넋 잃은 혼의 낭송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기존의 낭송 패턴에 따귀를 때려야 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캐릭터와 창의력과 참신성을 가진 낭송을 해야 한다. 역사 이래 예술사조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생겨났듯이 낭송의 사조 또한 시대 상황에 맞게 변해야 한다. 빈 분리파의 슬로건이었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 구호는 변화 없는 당시 미술사조에 빠진 빈 미술가 협회에 맞서 외친 구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보들레르는 바닷새인 신천옹을 시인에 비유하면서‘시인은 직관력과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예지를 지닌 사람’이라 했다. 시인이나 예술가의 삶은 고뇌와 시련을 겪으면서 창작에 매진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세상의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와 빛을 준다.
이렇게 혼신의 열정을 쏟으며 시인은 한 톨의 시라는 이삭을 수확한다. 수확한 그 이삭에 입혀진 운율적 요소를 낭송가는 목소리를 통해 선율의 옷을 입혀 낭송한다. 우린, 이렇게 우러나온 시혼의 낭송에서 커다란 울림의 메아리를 듣고, 거기서 오는 감동과 울림에서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끝없는 반복의 쳇바퀴 속에 갇힌 시지포스나 붙박이장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일상에 얽매인 삶을 깨우쳐야 한다고 느낄 때, 시 낭송의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한 울림의 낭송은 일상에서 찌들었던 삶의 찌꺼기를 확 벗어 던져 줄 것이다. 그때 낭송의 향기로 꽃 멀미도 하고 답답한 가슴은 열어젖히면서 낭송 한 줌 한 방울로 이도 닦고 샤워하자. 타는 목마름의 갈증 해소하면서 힐링 한잔 들이켜자.
공연장에 가서 시 낭송 한 송이를 곱게 접어 가슴에 품는 것은 텅 빈 영혼에 무한한 향기 한 톨 심는 것이고, 그 한 톨에서 피어난 향기 또한 차마 씻어 낼 수 없는 심혼의 향기로 남을 것이다. 심혼의 향기에 취하려면 시 낭송의 공연장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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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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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칼럼] 시의 입술에 소리의 색을 바르다 - 코스미안뉴스
문학과 음악, 그 어떤 예술이든 우리의 삶과 뗄 수 없는 연결고리로 얽혀 있다. 숲속의 새들과 들녘의 농작물과 흐르는 시냇물, 경로당의 어르신들과 유치원의 어린이 등은 결코 누구에게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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