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보슬 봄비가 잎을 떨구고 난 가녀린 나뭇가지 끝에 맺혀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비꽃’이다. 칼릴 지브란이 ‘이슬방울’에서 바다의 비밀을 알아내듯, 비꽃 방울은 다른 방울과 주변의 나뭇가지를 안고 있고, 또 다른 비꽃의 방울 속에도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안기고, 서로를 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슷한 예로, 백화점이나 때론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사방이 유리로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서 있는 나를 볼 때 사방으로 반사되어 비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화엄 세계를 상징하는 相卽, 相入을 떠올리고 또한,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망(帝釋網)’의 비유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하나의 보석이 모든 보석에, 모든 보석은 하나의 보석에 있다는 ‘일중다, 다중일.( 一卽多, 多卽一의 세계’, 이른바 相卽, 相入 ‘중중무진重重無盡’의‘법계연기法界緣起’의 경지이다
이처럼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연기설緣起說’이 아닌가 싶다.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 타자와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도 그 조건이 사라지면 고통이 없어지듯이 불교에서 연기는 언제나 서로 의존적이다. 그래서 자아설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지팡이가 부러졌을 때, 자아가 있다면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팡이 또한, 연기적 존재물이게 자아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렇듯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존재에 대해 참된 것이 있는 것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관념적인 플라톤의 ‘이데아’가 있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반대로 “만물은 유전한다.”라면서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19’가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코로나 19’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적 방식이다. 즉 ‘코로나 19’라는 이데아의 모방들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그토록 시를 싫어했던 그의 유명한 시인 추방론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와는 반대로 만물은 흐른다고 한다. 그는 모든 존재는 연관성이 있고 흐름을 중시한다. 이렇게 변화를 중시한 그의 세계관은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적이라는 불교의 연기설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때 “이것은 나의 몸”이라 했고, 포도주를 주면서는 “이것은 나의 피”라고 했다. 물론, 사상적, 철학적 배경은 다르지만, 相卽, 相入의 화엄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주신 떡과 포도주 안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아무리 보기 싫고 미운 원수라도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밉든 곱든, 싫든, 좋든, 희로애락과 애증이 교차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 함께 어울려 한 몸처럼 살아간다. 그러니 “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입장은 화엄의 不一不二의 세계와 같은 맥락이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초월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
숲길을 걸을 때 만나는 나무와 풀, 온갖 열매와 야생화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품에는 햇빛과 바람, 이슬과 비, 눈과 얼음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우주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발견한, 나 자신 또한, 우주의 일부가 아닌가. 우린 바다 위에 떠다니는 빈 페트병이나 스티로폼같이 외롭게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안고 안기고 있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화엄사상의 핵심은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즉,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이다. 한 방울의 이슬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한 톨의 콩에서 우주를 볼 수 있으니 안과 밖이 둘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의 요한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했듯이 말이다.
한 톨의 콩을 바라보자. 콩을 시루에 물을 주어 키우면 콩나물이 되고, 삶아서 띄우면 누룩이 되고 된장이 된다. 같은 콩이지만 ‘콩나물’이 되고, ‘누룩’이 되고 ‘된장’이 된다. 이렇듯 연기적 조건에서 바라보면 본성이 달라지면서 규정성 또한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이 자기의 견해가 영원불변한 것처럼 주장하는 견해는 매우 독선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의 실재’를 의미하는‘법계연기’는 화엄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고 근본 관념이다. 화엄종은 이러한 연기 사상을 정교하게 극대화해서 체계화한 종파이기도 하다.
독도의 바위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우리나라의 영토가 좁아질 뿐 아니라 지구의 표면면적 또한 그만큼 작아진다. 왜냐면,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의 한 부분이고 지구의 한 부분이기에. 이처럼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적이고 연관돼 있다. 평소에 상식적이고 인습적인 우리의 사고를 전도轉倒 시켜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純粹의 前兆(Auguries of innocence)/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下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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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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