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이 남도 지역이어서 판소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어떤 공연이나 특히 회갑연 때는 남도 잡가나 판소리 단가 등을 많이 듣게 되는데, 옆지기 또한, 판소리를 취미 삼아 활동하기에 함께 공연 다니기도 한다.
판소리 기원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마을에서 큰 굿을 하면서 벌이는 판놀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또한 이러한 놀이 형태에서 소리 광대가 소리와 만담, 재담, 몸짓 등을 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시대는 조선 전기에도 불렸을 것으로 보는데 자료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이 남아있는 조선 영조 시대부터 봐야 할 것이다.
판소리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어 왔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의 구례, 순창 등에서 불리는 동편제는 웅장하고 씩씩한 남성적인 특징이 있고, 해남, 광주, 보성 등에서 불리는 서편제는 섬세하고 감칠맛 나는데 동편제에 비해 여성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중고제가 있다.
이러한 판소리의 3대 요소는 소리인‘창(唱), 즉 노래와, 곡조 없이 보통 대사를 읽는 듯한 ‘아니리’ 그리고 판소리 창을 하면서 하는 몸짓 언어인‘발림(너름새)’을 3대 요소라 한다. 여기 3대 요소에는 없지만, 고수나 관객들이 함께 호응하면서 던지는 ‘얼쑤’‘얼씨구 좋다’ 등의‘추임새’도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가 판소리의 시작과 끝을 ‘바탕’이라 하는데‘마당’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특히 소리꾼이 한 마당 노는 가운데 자기만의 특별한 형식이나 개성적으로 다듬은 형식을 ‘더 넣는다’ 뜻인 ‘더늠’이라 한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의 ‘더늠’이 매우 유명하다. 이것은 서양의 협주곡 마지막 종지부에서 기교가 요구되는 자유로운 무반주 부분인 카덴차와 재즈의 애드립 등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리꾼이 한 마당을 잘 다듬어 놓은 소리를 ‘바디’라고 한다. 임방울의 춘향가 중 ‘쑥대머리’의 더늠이 유명하듯 그렇게 소리의 기법이나 상태 등을 ‘시김새’라고 한다. 그 시김새에 가슴 깊이 느껴지는 깊은 맛과 멋의 감흥을 흔히 ‘그늘’ 있다고 하기도 하고 ‘그늘 친다 ’고 한다.
이렇게 멋진 우리의 가락을 듣던 사람들은 그늘 있는 소리에서 맘 편하고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에서 잠시라도 시름을 내려놓았다.
필자의 젊은 시절에는 음악다방이 많았다. 그곳에서 DJ에게 신청곡을 접어서 DJ BOX에 넣어주기도 했고 또한, 고고장과 야전(야외전축) 들고 야외로 신나게 춤추며 놀았던 생각이 난다. 그 시절에 즐겨 들었던 블랙 샤베스나 레드 제플린, 스콜피언스 등등, 그리고 왜인지 들어둬야 할 것 같고, 교양 없는 philistine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베토벤 교향곡이나 베르디의 소나타, 몽환의 드뷔시 음악, 미친 듯한 자크린 뒤프레의 첼로 연주 등을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이 듦에서는 판소리가 들리고 시나위 합주와 수제천이 보인다. 이렇게 그 나라의 민속음악은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듣고 난 뒤 마지막에서야 들리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국내에서는 유난히 클래식 연주와 음악회에 가서 듣는 성악이나 연주회 등에 대해서 관람자들의 대부분은 타 장르의 음악과 구별 지으려고 한다. 대단히 지적이고 상층의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말이다. 꼭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이미 지동설로 판정 났는데 아직도 클래식 천동설을 믿는 이들이 많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아직도 옴파로스 증후군 같은 사고를 던져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제발 지동설의 현실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지식인 척하는 그들의 뇌를 세탁기에 돌리든 손빨래로 쥐어짜야 한다. 서양음악인 클래식이 한강의 본류이고 국악은 홍제천이나 중랑천 같은 지류란 말인가?
창해일속(滄海一粟) 같은 인생이다. 백 년을 산다고 해도 부싯돌같이 번쩍이는 순간의 삶일 뿐이다. 이러한 삶에서 가끔 우리의 음악을 들어보자. 판소리 동편제의 지리산처럼 웅장하고 남성적이고 담백한, 주변 초목들이 떠는 듯한 웅장한 소리를 듣거나. 바닷가 해안선처럼 부드럽고, 초서체 같은 음성의 여성적인 서편제 음악을 들어보면서 잠시 忘我의 시간을 가져보자. 때론, 삶이 혼란스럽고 부조리하다고 느껴질 때 남도 시나위 한 곡 들으면서 부조화의 조화를, 혼돈 속의 질서를 찾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보자.
논어에서 얘기하듯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되 마음 상하지 않는다”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음악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다양한 느낌들을 억제하고 다스리고 가라앉히는, 판소리와 민요, 시나위 합주, 구음 시나위 등의 음악 등이 이러한 우리의 민속음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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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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